지성주의 영성에 대한 성경의 시각

모세가 축복한 레위 지파는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는' 지파였다. 레위인들은 연구하고 가르치는, 즉 지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가지 직무를 다하기 위해 다른 직무들이 면제되었다.

 

생물학 교수는 조직신학 교수와 다를 바 없이, 지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기에 자연 세계를 탐색하고 설명하는 모든 학문은 하나님의 성품을 조금이라도 밝혀 주어 우리로 그분을 더 잘 알게 해줄 수 있다.

 

설교는 일반 교회 예배의 결정적 부분이다. 설교는 예배에 앞서거나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배 자체다. 잠언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 훈련된 지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말씀도 많이 있다.

 

예수님도 친히 지적 성향을 보여 주셨다. 열두 살 때 그분은 성전에서 율법을 논하고 있었다. 가르침은 그분의 사역에 큰 부분을 차지했다. 사람들을 하나님께 가지 못하게 막는 지적 책략이라면 그분은 강력히 비난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 뿐 아니라 생각도 변화되어야 함을 잘 아셨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지성주의 영성의 훈련 분야를 살펴보자

 


 

지성주의 영성의 훈련 분야

지성주의자들은 신학 훈련의 기초 분야를 배워 자신의 신앙을 넓히려 애써야 한다.

 

다음은 신학 훈련의 기초 분야이다.

1. 교회사
2. 성경 연구
3. 조직신학
4. 윤리학
5. 변증학

 

지성주의 영성의 유혹을 살펴보자

 


 

지성주의 영성의 유혹

변론을 좋아함

디모데는 변론을 좋아하는 지성주의자가 아니었나 싶다. 디모데에게 보낸 바울의 두 편지에는 '신화와 끝 없는 족보에 착념하는' 자들을 삼가라는 강력한 권고가 몇 차례 나온다.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그런 사람은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이 바울이 디모데 자신에게 준 권고 못지 않게 디모데를 따르는 자들에게 준 경고이기도 하다. 그러나 디모데후서에 가면 경고가 좀 더 개인적 색채를 띤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바울은 다른 지도자 디도에게도 마찬가지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어릿거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바울은 이런 분열 조장을 아주 대단히 심각한 죄로 보았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교만한 지식 자랑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다.

 

행동 없는 지식

지성주의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옳은 길을 아는 것으로 옳은 삶을 사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옳은 길을 알수록 언행일치의 책임이 더 커진다. 야고보는 선생들이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잠언서에 따르면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공부하여 깨달은 의의 길을 열심히 삶에 적용하는 사람이다. 바른 생각은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필수지만 바른 행동도 똑같이 필수다.

 

교만

교만은 뛰어난 지성인들의 공통된 약점이다. 그것은 무턱대고 아무나 교정해 주려는 공통된 욕구를 통해 나타난다. 다른 사람의 지적 약점을 비판하지 않고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의 자존감이 자신의 지적 우월성을 내보이는 능력에서 비롯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남달리 뛰어난 지성의 은사를 주셨거든, 교회를 섬기라고 맡겨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목소리가 아름다운 사람도 때를 못 가리고 노래한다면 얼마든지 불쾌감을 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성이 뛰어난 사람도 다른 사람들을 적절한 담론에 끌어들일 때와 장소를 모른다면 얼마든지 반감을 줄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묵상주의자들

묵상주의 영성의 역할에 대한 최고의 설명 중 하나를 베냐민 지파에 대한 모세의 예언 겸 묘사에서 찾을 수 있다.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새도록 보호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

 

'하나님의 어깨 사이에 처하는 것'이야말로 묵상주의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누리기 원하며, 갈수록 더 깊은 방식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원한다. 하나님은 감정 없이 순종하는 종보다는 다른 모든 인연을 불살라 버릴 만큼 강하고 뜨거운 사랑을 구하신다. 묵상주의자들은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 준다.

 

행동주의 영성은 묵상주의 영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전통주의 영성은 묵상주의 영성을 얄팍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지성주의자에게는 묵상주의 영성의 예배가 신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열정주의자에게는 묵상주의 영성의 예배가 지루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묵상주의 영성의 예배가 소중하고 값진 것이다.

 

묵상주의 영성의 행위를 살펴보자

 


 

묵상주의 영성의 행위

예수님 기도

역사적으로 묵상주의자들은 '예수님 기도'를 애용했다. 예수님 기도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아주 간단한 기도다. 때로 그보다 짤막한 형태가 사용될 수도 있다.

 

은밀한 헌신의 행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은밀한 헌신의 행위'를 권하고 싶지만 특히, 묵상주의 영성이 두드러진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은밀한 헌신의 행위란 혜택을 입는 당사자를 포함해 아무에게도 내 정체를 알리지 않고 몰래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무명으로 선물을 줄 수도 있고 누군가를 '뒤에서' 도와줄 수도 있고 카드를 보낼 수도 있다. 은밀함은 내 행위에 오직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외에 다른 동기가 없다는 증거다.

 

모든 친밀한 관계에는 비밀이 있다. 남편과 아내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둘만의 비밀이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분과 나 둘만의 비밀을 간직하는 것은 친밀함의 일면이다. 우리 쪽의 비밀이란 내가 아무도 모르게 행한 섬김일 수 있다.

 

그밖에 묵상주의 영성의 행위는 아래와 같다.

1. 춤추는 기도
2. 집중 기도
3. 마음의 기도
4. 십자가 길이 14처소
5. 묵상 기도

 

묵상주의 영성의 유혹을 살펴보자

 


 

묵상주의 영성의 유혹

균형 상실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사랑을 찾으려는 건강한 열망 때문에,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그 사랑을 보여 주실 수 있는 방법을 제한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기뻐하기 원하시지만, 그분이 지으신 사람들과 세상 속에서 기뻐하는 것도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지으신 것과 함께 있는 즐거움이 배제되는 것이다. 건강한 묵상주의자들은 고독 속의 친밀한 기도 못지 않게 풍성한 인간 관계도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길임을 이해한다. 좋은 음악, 아름다운 자연, 예술, 여가에는 모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작은 축제가 담겨 있다. 그래서 우리는 피조 세계의 경이를 음미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릎 꿇고 기도할 때 못지 않게 동료 신자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다.

 

자아의 흡수

정통 기독교 범주를 벗어나는 묵상 형태들이 있으므로 묵상주의자들은 조심해야 한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르치지 않고 인간의 자아가 하나님께 흡수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묵상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고, 우리는 언제나 인간이며, 그 둘은 절대 교차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있으나 하나님 안에 흡수될 수는 없다.

 

그런 어리석은 주장은 기독교의 생각이 아니다. 그저 자신을 '비워' 진공 상태에 들어가야 한다는 식의 묵상을 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원하는 것은 속이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것이다.

 

덕을 잊음

위대한 묵상주의자들은 악을 줄이지 않고는 신앙의 진보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역사적으로 금욕주의에서 묵상의 역할이 떨어져 나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마음 속으로 세상의 죄악된 쾌락을 탐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런 얼굴을 응시할 수는 없다. 묵상주의자들은 미숙한 심취 상태를 벗어나 자기 훈련과 절제를 통합하는 쪽으로 자라야 한다.

 

결혼한 부부가 서로 반한 상태를 벗어나 자기 희생에 기초한 헌신으로 깊어져야 하는 것처럼 묵상주의자들도 단순한 묵상을 벗어나 우리 뜻을 조정해 그리스도께 맞춰 순종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영적 체험에 중독되는 것

고대인들은 묵상을 천국의 기쁨의 맛보기로 알았다. 묵상을 이 땅에 무한정 계속될 것으로 묘사한 적은 거의 없다.

 

묵상주의자들은 이 땅의 몸에 한계가 있듯이 이 땅의 영혼과 감정에도 한계가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지금 누리는 영적 기쁨에 감사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일시적 특성도 용납해야 한다. 하나님 대신 감정을 구하는 '영적 탐식'도 조심해야 한다.

 

성경 속에 자연주의 영성

현대 문명 때문에 오랫동안 가려진 진리이긴 했지만 분명 성경은 야외에서 읽도록 된 책이다. 구약성경과 복음서의 많은 이야기와 비유는 자연에 바탕을 둔 것이다. 따라서 자연 속에서 그 의미와 힘이 되살아난다.

 

'생수의 강'이라는 표현을 프로젝터로 벽에 비추면 무언가 이상해 보이지만 빠른 물살의 강가에 서면 그 위력이 생생히 밀려온다. '푸른 초장'이라는 말도 고속도로와 스포츠 경기장에서 아득히 먼 야생 초원에 들어서면 의미가 달라진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타나심', 즉 그분이 임하신 사건은 대부분이 광야에서 일어났다. 하나님은 사막에서 하갈을, 산에서 아브라함을, 강나루에서 야곱을, 불 붙은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만나 주셨다.

 

예수님은 자주 시골에서 가르치셨다. 분명 예수님은 자연의 실물을 지적하며 가르치셨을 것이다. 새를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실 때,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새들을, 꽃의 아름다움을 말씀하실 때는 꽃을 가리키셨을 것이다. 예수는 산상수훈도 야외에서 전하셨다.

 

자연에서 얻는 영적 교훈을 살펴보자

 


 

자연에서 얻는 영적 교훈

영적 진리의 시각화

하나님께서 지으신 무한한 자연을 보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무한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날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캐스팅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연의 언어와 교훈'이라는 제목의 글을 남길 만큼 자연의 비유를 좋아했다. 장미에 가시가 있다는 사실은 '모든 현세의 단맛에 쓴맛도 섞여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고, 파리를 잡어먹는 거미는 '마귀와 유혹'을 나타내 주며, 바다로 흐르는 강물은 '만물이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가 듣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피조 세계를 통해 말씀하실 것이다. 책을 읽거나 설교를 듣는 당신의 시간이 고인 물처럼 정체돼 보이거든 코트와 지팡이를 들고 야외로 나가라. 거기 닫지 않는 학교가 있다.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아울러 하나님을 더 밝히 볼 것이다.

 

하나님을 더 밝히 봄

하나님은 종종 자연에서 그분 스스로를 계시하시며 우리를 만나 주신다. 기독교 신앙 고백서들과 신자들 개개인이 증거해온 성경의 진리이다.

 

아름다운 신앙의 찬송,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는 피조 세계가 우리를 하나님께로 부르는 모양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숲 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하나님의 존재와 경이는 날마다 만인의 눈앞에 훤히 드러나 있다. 진리에 머리와 가슴을 열고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자연에 계시된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다.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도 계시되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비와 은혜의 하나님이자, 동시에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임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러니 땅을 비옥하게 하는 비가 열대성 폭풍이 되어 해안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봄날의 채소를 살찌우던 태양이 여름철 미약한 식물을 살라 버릴 수 있다. 여름에 우리를 시원케하는 바람이 봄날 돌풍이 되어 집을 날려 버릴 수 있다.

 

피조 세계를 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라.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과 심판도 생각하라.

 

안식을 배움

우리한테 늘 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이 필요할 때도 있다. 몸과 영을 쉬기에 자연보다 좋은 곳은 없다.

 

예수님은 분주한 사역 일정 중에도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며 힘을 얻곤 하셨다. 제자들한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셨다.

 

우리를 돌보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피조 세계는 하나님이 우리의 추운 마음을 덮어 주시는 따뜻한 이불일 수 있다.

 

자연주의 영성의 유혹을 살펴보자

 


 

자연주의 영성의 유혹

하나님의 영적 진리를 시각화하여 보는 자연주의에도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개인주의

예수님은 야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셨으나 다시 세상에 돌아가기 위한 준비로 그리하셨다.

 

우리는 자연을 구실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분을 피하고 있지 않은지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한다.

 

영적 미혹

심리학자들은 성지를 여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성경 인물이나 심지어 예수님으로 생각할 정도로 감격에 빠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나님의 음성은 자연을 통해 속삭일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통찰을 아주 세심히 검증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산책 중에 '받았다'고 해서 무조건 권위를 둘 것이 아니라, 검증 대상의 조언으로만 생각해야 한다. 확실한 기준은 성경뿐이다.

 

사탄은 우리를 곁길로 빠뜨리려 모조품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런 모조품 체험을 구하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한다.

 

자연의 우상화

어떤 자연주의자들은 범신론, 즉 자연 숭배의 우상에 쉽게 빠질 수 있다. 범신론은 거짓말이다. 모든 자연 속에 하나님이 있다든지, 자연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단, 피조 세계에 둘러싸일 때마다 하나님의 존재를 보는 것은 사실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땅이 주님의 것'이라고 가르친다. 범신론은 그것을 살짝 비틀어 '땅이 곧 주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작품의 감상을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범신론의 거짓말에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물리적으로 자연 속에 있지 않다. 그러나 보는 눈이 있는 자에게는 그분의 자상한 관심, 뛰어난 창의력, 질서, 그리고 그 이상 훨씬 많은 것들이 밝히 보인다.

 

자연주의도 심하면 중독이 될 수 있다. 성령이 없다면 우리도 우상 숭배의 선을 넘어 범신론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가르치는 건전한 교리우리를 지도하시는 성령이 있기에 우리는 범신론이라는 이단에 빠지지 않고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자연의 메세지를 음미할 수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