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주의 영성

성경에는 행동주의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모세, 엘리야, 엘리사, 하박국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을 통해 행동주의 영성의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대결로 하나님을 예배한다. 사회 개혁에 참여한다던가, 누군가의 회개를 촉구한다.

 

행동주의 영성의 유혹을 살펴보자

 


 

행동주의 영성의 유혹

판단적 태도

행동주의자들은 자신이 거룩해질수록 죄를 더 미워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맞다. 그러나 행동주의자들이 종종 오해하는 부분은, 논리를 비약시켜 자신이 거룩해질수록 죄인들을 그만큼 용납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기독교 고전을 좋아하다 깨달은 것이 있다. 대다수 영성 작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믿음이 성숙할수록 우리는 자기 삶의 죄를 더욱 버리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죄인들을 더욱 긍휼히 여긴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거룩한 증오뿐 아니라 우리의 사랑도 자라야 한다. 자기 의비판적 태도는 그리스도의 긍휼을 닮은 모습이 아니다. 행동주의자들이 보기에 죄를 정말 미워하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다시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과도히 보상하려 죄인에 대한 사랑에 인색해질 수 있다.

 

야망과 섹스

관찰과 전기를 통해 보건대 야망의 수위와 성적 유혹 사이에는 영적으로 직접적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남자들의 경우 특히 그렇다.

 

야망이란 그 뿌리를 깊이 파보면 무력감에 대한 싸움, 통제권에 대한 싸움일 때가 많다.

 

야망의 사람은 본래 이기적이기도 하다. 타인의 복지를 우려한다는 명분이 있기에 이들의 통제권 추구는 제동을 모르며 그래서 필시 정욕의 비옥한 온상이 된다. 이렇듯 정욕은 야심만만한 영혼 안에서 아주 편안한 집을 얻을 수 있다.

 

엘리트 의식과 적의

행동주의 영성의 양식은 대결이므로 행동주의자는 남들이 대결을 그토록 겁내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시위나 노방전도라면 생각만으로도 몸이 움츠러드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큰 흥분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여기서 엘리트 주의적 태도가 나올 수 있다.

 

활동과 통계 수치에 집착함

장난감이 뭔가에 끼어 빠지지 않거나 매듭이 좀처럼 풀리지 않아 속상할 때 어린아이는 그럴수록 더 거기에 집착할 수 있다. 대개 상황은 더 악화되기 마련이다.

 

진실성노력은 든든한 두 다리다. 그러나 의자에 안정성을 주려면 두 다리만으로 부족하다. 행동주의자들에게는 진실성과 노력 외에도 신중한 기도가 필요하다.

 

개인적 성화에 소홀함

예수님은 이웃의 눈에서 티를 빼내기 전 먼저 우리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라고 밝히 말씀하셨다. 사회 개혁은 사회를 개혁하려는 개인의 삶에서 시작된다.

 

사회 참여는 절대 개인적 성화를 대치할 수 없다. 사실 개인의 성화 없는 사회 참여는 득 못지 않게 해가 될 수 있다. 위선자로 드러나면 그만큼 대의를 그르치기 때문이다.

 

성경과 금욕주의 영성

고독한 금욕주의자 하면 당장 세례 요한이 떠오르지만, 예수님도 그런 성향이 있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예수님은 고독과 금식으로 40일을 보내셨다.

 

그분은 기도란 은밀한 곳에서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고, 언젠가는 제자들이 금식할 것을 전제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역의 어려운 순간마다 다시 고독을 찾으셨다. 세례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으셨을 때와 무리에게 쫓기실 때가 좋은 예다.

 

금욕주의 영성의 세 가지 세계를 살펴보자

 


 

금욕주의 영성의 세 가지 세계

고독

우리는 신앙의 표현을 위해 굳이 사막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 내적 초연함이 있다면 가장 북적이는 도시 한복판에서도 외로운 사막을 찾을 수 있다.

 

금욕주의자들은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매일 필요할 수도 있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그 사실을 알아 주어야 한다.

 

청빈

감각주의자들은 오감을 통해 하나님께 끌리지만, 금욕주의자들은 오감에 오히려 방해 받을 때가 많다. 그래서 그들은 감각을 차단하려 한다. 수도사들은 기도와 금식을 방해 받지 않기 위해 감각의 자극이 낮은 환경을 고르곤 했다.

 

엄격함

기독교의 참된 금욕은 고난이나 자기 부인을 목표로 구하지 않고 수단으로, 즉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다른 것을' 사랑하는 길로 구한다.

 

율법주의에 젖은 바리새인들은 불가능할 정도로 높은 기준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에 게 의무적으로 지키게 하면서도 자신들은 뒤에서 호사를 누렸다. 참된 금욕주의자는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타인을 대할 때는 초자연적 너그러움으로 대한다.

 

금욕주의 영성의 유혹을 살펴보자

 


 

금욕주의 영성의 유혹

개인적 경건의 지나친 강조

스가랴서에 보면 백성들이 여러 해 동안 해오던 대로 울며 금식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여쭙는 장면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스가랴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겉치레뿐인 경건 대신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나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 것을 명하신다.

 

예수님은 고독 속에 장시간 기도하셨지만, 그것은 공적 사역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방식, 사역에 뒤따른 고독과 안식을 가르치셨다.

 

세례 요한은 금욕주의자의 역할을 취했지만, 그것 역시 지극히 공적인 사역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영적 회복에 대한 우리의 필요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우리의 본분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고통을 위해 고통을 구함

매저키즘은 신앙 노선이 아니라 병이다. 현대 사회의 우리 많은 사람들은 욕구 충족에 익숙해 있어, 조금만 불편해도 질색하며, 즉각적 해결을 요구한다.

 

그와는 반대로, 왜곡된 자아상과 병든 심리로 인해, 고통을 위해 고통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고대 금욕주의자들이 주는 교훈도 아니고 현대 금욕주의 영성의 바른 표현도 아니다.

 

건강한 금욕주의자들은 금욕이 목표가 아니라 수단임을 분명히 한다. 금욕이 목표 자체가 될 때마다 예로부터 검증되어 온 값진 기독교 행위가 무참히 왜곡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내려는 시도

금욕주의자들이 실천하는 '영웅적' 신앙 행위는 자칫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내려는 시도가 될 수 있다. 남다르게 거룩해짐으로 하나님의 인정이나 용서를 얻어 내려는 것은 부질 없는 일이다.

 

우리의 행동과 삶,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것이다. 금식하고 땅바닥에서 자고 단순한 삶을 산다고 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더 커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금욕주의자들은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며 그분의 용서는 오늘 우리가 행하는 영적 체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신 사역에 기초한 것이다.

 

열정주의 영성: 신비의 세 가지 모습

하나님이 신비로 역사하셨고, 지금도 역사하시는 방법 중 하나는 을 통해서다. 하나님이 꿈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성경에 잘 입증되어 있다. 하나님은 야곱, 요셉, 솔로몬, 다니엘에게 꿈을 통해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꿈을 통해 말씀하신 기사는 신약성경에서도 나온다. 요셉과 동방박사들이 좋은 예다. 신약에는 환상도 여러 번 나온다.

 

환상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받는다는 점에서 꿈과 다르다. 바울, 아나니아, 고넬료, 베드로는 다 환상을 받았다.

 

하나님이 꿈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개념은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한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추적하시고, 우리가 잠든 중에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한정되고 유한한 인간 실존에 대비해 무궁하고 무한하신 당신 성품의 증거를 보여 주신다.

 

기대감

열정주의자들은 기대감의 신비를 가꾸려면 아침에 일어나, 그날 자기가 섬길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좋다. 그것이 전도의 기회이든, 낙심한 신자를 격려하는 기회이든, 이런 기대감은 열정주의자들의 신앙을 활기차게 한다. 하나님의 역사를 가시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의 필요는 엄청나며 하나님은 그것을 알고 계신다. 그분과 협력하여 우리는 초자연적 방법으로 움직일 수 있다.

 

기대감을 키우는 또 다른 방법은 영적 모험에 나서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려는 희망으로 낯선 이와 대화를 시작하거나 믿음으로 미지의 상황에 들어설 때 열정주의자의 신앙은 충만해질 수 있다.

 

기도

기도보다 신비한 것이 있을까? 보이는 것을 변화시켜 달라고 보이지 않는 분께 부르짖는 것이 곧 기도다.

 

열정주의자들은 자신의 삶 속에 기도의 주머니를 만들어야 하며,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열정주의 영성의 유혹을 살펴보자

 


 

열정주의 영성의 유혹

체험을 우해 체험을 구하는 것

단순히 체험을 위해 기적 체험을 구하는 것은 우리를 그저 '도취'를 원하는 영적 약물 중독자로 만든다.

 

열정주의자들은 새로운 체험을 구하기보다 하나님을 구하고 사랑하는 데 머물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영적 체험' 자체를 위해 그것을 구할 때, 그런 체험은 실제 악해질 수 있고 악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독립 성향

어떤 다른 기질보다도 열정주의 영성이야말로 신자 개개인의 책임을 감시해 줄 수 있는 든든한 교회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교회의 감시가 없는 초자연적 체험은 재난의 확실한 전조다.

 

우리의 최종 권위는 성경이지만,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이 배웠고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적용하고 있는 지혜를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감히 꿈에나 그릴 수 있는 영적 실체를 체험한 사도 바울도 친히 예루살렘 사도들의 회의 결과에 따랐다.

 

'좋은 기분'과 '좋은 예배'를 동등시하는 것

순전한 예배는 하나님께 충성과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우리 의지의 행위이다. 단지, 예배 시간 중 기분이 좋았다고 해서 적절한 방식으로 우리 의지를 올려 드렸다는 뜻은 아니다.

 

거꾸로 기분이 가라앉거나 '덤덤하다'고 해서 제대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지 않다는 뜻도 아니다. 감정이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다. 열정주의자들이 감정을 즐기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다만, 감정에 의존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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