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에 화려한 하나님

하나님의 천국 영광에 대한 성경 기사들은 아주 수려할 뿐 아니라 최소한 조용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한 예로 에스겔이 기록한 체험을 생각해 보라. 그는 폭풍을 느낀다.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는 것이 보인다. 신기한 형상과 웅장하고 휘황한 사파이어 보좌도 보인다. 그는 크게 울리는 소리요란한 물살 같은 날개 소리를 듣는다.
 
에스겔은 이어 하나님의 명에 따라 꿀 같이 단 두루마리를 먹는다. 다 끝난 후에도 에스겔은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 채, 감각의 맹공이 너무 강했으리라, 충격 속에 앉아 7일을 보낸다.
 
겔 10장에도 비슷한 출현이 나온다. 에스겔은 불타는 숯불, 영화로운 광채, 요란한 소리, 성전에 가득한 구름, 신기한 광경과 동작, 황옥처럼 빛나는 바퀴, 네 얼굴의 그룹들을 경험한다.
 
성전에 영광이 돌아오자 성경은 다시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이 그 영광으로 인해 빛났다고 말한다. 어찌나 장대한 광경인지 에스겔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나타나신 요한계시록의 경험도 매우 감각적인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자 요한은 그것을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이라 묘사했다. 예수님의 머리와 털은 '희기가 흰 양털 같고 ··· 그의 눈은 불꽃같고', 예수님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예수님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았다. 해를 쳐다보려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햇빛이 너무 밝아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바로 요한이 그랬다.

"내가 ··· 그 발아래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하나님의 이런 영광의 모습은 요즘 흔히 축하 카드에 많이 나오는 얌전하고 조용한 예수님 그림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런 그림은 십자가에서 고난받아 상하고 피 흘리신 예수님과도 전혀 닮은 구석이 없다.
 
침묵만이 경건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천국이 약간 불편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것이 우리가 감각주의 영성에서 배우는 교훈이다.
 
우리의 오감은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감각을 통한 즐거움은 사탄의 착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이디어였다.
 
우리 각자 안에는, 미의 존재 앞에 감탄하는 뭔가가 있다. 그것이 초월적 천국에 대한 우리 갈망의 찰나적 단면이라고 느껴진다. 그런 눈을 가질 때 예배의 감각적 측면에 마음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감각 깨우기

 


 

감각 깨우기

청각

예배에 음악을 사용하라는 성경의 권고는 놀랄 일이 못된다.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은 언어와 음악이 합해지면 언어만 있을 때보다 두뇌에 더 자극이 된다는 것을 아신다.
 
아주 현실적 의미에서, 회중은 설교 때보다 특별 음악 순서 때 더 '살아 있을' 수 있다. 가르침은 잊어버려도 노래 가사는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다.
 
루터는 성경이 본래 읽기보다는 듣도록 된 책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가장 잘 변화되고 도전 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루터의 통찰의 타당성이 과학으로 입증되고 있다. 성경을 그냥 읽기보다는 읽혀지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의 생각은 더 활성화 된다.
 

후각

냄새는 기억을 굳혀줄 수 있다.
 
구약 시대에 향이 예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냄새의 바로 그런 특성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익숙한 냄새는 예배자에게, 예배가 유난히 풍성했던 때를 떠올려 줄 수 있다. 예배 후 남아 있는 향기는 신자에게 예배의 경험을 되살려 준다. 그렇게 한동안 지나면 신자는 냄새에 조건화되어 하나님의 임재에 의식적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향품의 헌물을 모아 냄새 좋은 향을 만들라고 명하셨다. 아론은 아침마다 향을 피워야 했다. 엘리와 솔로몬은 향을 사르는 일이 중단되지 않게 했다. 향기로운 향을 만드는 구체적 지침은 출 30장에 나와 있다.
 
하나님은 말라기에서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라고 예언하신다.
 
아기 예수에게 드려진 예물 중에도 유향이 있었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향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성도들의 기도와 끊임 없이 올려진다. 시 141:2에는 향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성경에 분향의 부정적 사례도 등장하지만 그것은 우상 숭배와 연관된 경우이거나 타락한 신앙 속에 드려진 경우다. 거부된 것은 향의 오용이지 사용 자체가 아니다.
 
기도에 몰입하기 힘든 경우 신자들은 개인적으로 낯익은 냄새를 써서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촉각

기도 중에 깨어 있기 힘들거나 마음이 어지럽다는 하소연을 나는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자주 듣는다. 새벽에 특히 그렇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작은 물건을 챙겨 손에 쥐고 한다면 기도가 한결 쉬워질 수 있다.
 
페이퍼 클립은 위태로운 부부관계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할 때 좋고 고무 밴드는 유연한 마음을 위해 기도할 때 좋다.
 

시각

시각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도 클 것이다. 우리 대뇌피질의 자그마치 3분의 1이 시각 처리에 할애된다. 그 정도면 인간 두뇌의 최고 수준이다. 연구진들은 시각의 활용으로 의지에 영향을 입힐 수 있다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의지는 믿음대로 살려는 우리의 헌신과 직결된다.
 
기독교 예배와 기도에 시각이 사용된 것은 성육신에서 기원한다. 물론 시각은 구약시대에도 예배의 필수 요소였다.
 
이스라엘의 예배 형태를 제정하실 때 하나님은 특별히 브살렐과 오홀리압 두 사람에게 재능을 주시고 지명하셔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셨다. 이 두 장인은 금은과 놋과 나무로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그들은 세마포에 수놓는 기술과 정교하고 수려한 베를 짜는 기술도 익혔다.
 
완성된 성전의 모습에 예배자들은 숨이 멎을 듯했을 것이다. 하나님께 아름다움은 중요하다. 성전 건축에 든 지출은 향기로운 제물이었고, 재능을 바쳐 성전을 지은 자들은 큰 존경을 얻고 '하나님의 신이 충만한' 자로 통했다.
 
그림이나 성상의 형태로 시각을 사용해온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성인의 순종을 상징하는 성상의 모습은 정교회 그리스도인이 어려운 성경 말씀에 마침내 '예'로 반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런가하면 성상에 나타난 이미지는 그리스도인을 기도로 이끌어줄 수도 있다. 성상에서 기도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예배 형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성상이 대변하는 실체를 떠올림으로 기도에 더 잘 집중할 수 있다.
 
아이들은 주의가 쉽게 산만해지기 때문에 기도의 집중을 위해 눈을 감게 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어른들의 경우 남을 위해 기도할 때 상대방 (혹은 사진) 을 보며 기도하면 기도의 능력이 더할 수 있다.
 
하늘을 보면서 예배하거나, 기도하거나, 시편을 외우면 방해되기는커녕 오히려 말의 진실성이 더해질 수 있다. 시각의 영향은 막대한 것인 만큼 예배에 통합되는 것이 절대 바람직하다.
 
창의적 그리스도인들은 시각 요소를 기도에 통합할 수 있는 자기만의 길을 찾을 줄 안다.
 

미각

맛의 비유로 표현되는 말이 많을 정도로 미각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다. 경험이 없어 뭘 모르면 '맛을 봐야 안다'고 하고, 반대로 경험이 알차면 '맛을 톡톡히 봤다'고 한다.
 
마음에 '쓴' 뿌리가 있는 사람은 심술을 부리며 양심을 품는다. '달콤한' 추억은 아주 아름다운 추억이다. 취직은 되었으나 타지로 떠나야 한다면 그것은 '쓴맛단맛'다 보는 셈이다.
 
두 연구자는 이렇게 말했다.

"소위 맛이라는 지각은 연상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위력과 강도가 아주 커 다른 모든 영억의 경험에도 맛의 언어가 자연스레 전이되는 듯 보인다."

 
미각을 사용해 영적 생활에 유익을 얻지 말아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진짜 포도주가 내 성찬의 체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앞서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성찬의 감각적 측면 때문에 자칫 성찬이 요구하는 헌신을 도외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맛은 건강한 영혼의 성찬 체험을 강화시켜 줄 수 있다. 서둘러 치르지 않고 시간적 여유를 갖는다면 특히 그렇다.
 
맛과 관련된 성경 말씀이 꽤 있다. 마 7:16은 열매로 사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다음에 유난히 맛있는 (혹은 썩은) 사과나 오렌지를 베어 물 때, 이 말씀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자처하셨고 우리를 이 땅의 소금이라 부르셨다.
 

감각주의의 영성의 유혹을 살펴보자

 


 

감각주의의 영성의 유혹

알맹이 없는 예배

감각은 우리를 속일 수 있다. 음악을 통해 감정이 고조될 때 특히 그렇다. 생각은 딴 데 가 있으면서 입으로나 주님 앞에 엎드리겠다고, 땅 끝까지 주의 이름을 전하겠다고,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약속한다.
 
햄버거를 주문할 때 만큼이나 무감각하게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배 중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미의 우상화

피조 세계의 감상에 애착이 스며들 때 자연주의자들이 우상 숭배에 빠질 수 있는 것처럼 정교한 성전이나 아름답게 그려진 성상의 감상에 애착이 개입되면 감각주의자들도 우상 숭배에 빠질 수 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일개 천사가 사람들 앞에 나타나면 성숙한 선지자들조차 그들을 예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들은 참되고 순결한 예배를 받으시기 합당한 유일한 분으로부터 우리 마음을 빼앗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참된 임재에 들어서지도 않은 채 극도로 아름다운 예배 의식의 감각적 체험에 만족해 자리를 떠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예배를 예배함

불행히도 우리는 오감을 사용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 오감을 사용해 예배를 예배하는 자리로 자칫 빗나갈 수 있다.
 
감각적 자극의지의 참된 헌신을 혼동할 때, 감각적 예배는 미숙한 것이 되어 버린다.
 

성경에 나오는 박애주의자들

박애주의자들은 자신의 소명과 기질을 이해하려 함에 있어 특히 두 사람을 살펴볼 수 있다. 모르드개와 예수다.
 

모르드개

에스더서에 그려진 모르드개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을 깊이 정성껏 돌보고 아낌 없이 에너지를 쏟아 도와 주는 이의 초상이다.
 
모르드개의 첫 번째 그림은 에 2:7에 나온다. 거기서 우리는 부모의 강제 이주로 인해 고아가 된 에스더를 거두는 모르드개를 볼 수 있다.

"그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같이 양육하더라."

 
에스더를 위한 모르드개의 수고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가 왕궁에 들어간 후에도 그는 늘 에스더가 잘 지내는지 깊은 관심으로 지켜 보았다. "모르드개가 날마다 후궁 뜰 앞으로 왕래하며 에스더의 안부와 어떻게 될 것을 알고자 하더라."
 

예수

유사 이래 진정 온전한 인간은 예수 뿐이었다. 그래서 예수에게는 9가지 영적 기질이 모두 보인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은 긍휼의 완전한 표상이었다. 그분의 삶은 특히 그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예수님은 병든 자, 귀신들린 자, 잃어버린 영혼을 돌보셨다. 그분은 제자들에게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셨고, 친히 무리를 보시며 몹시 측은히 여기셨다.
 

박애주의 영성의 여러 형태를 살펴보자

 


 

박애주의 영성의 여러 형태

우리는 박애주의 영성의 정의를 환자들에 대한 간호로 제한시킬 필요가 없다. 이웃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은 얼마든지 많으며, 박애주의 영성은 그것을 잘 통합한다.
 
노인의 침상 옆에 말 없이 앉아 있어 주는 것도 긍휼일 수 있다. 자원봉사 구조대에서 일하거나 집을 수리해 주는 것도 긍휼일 수 있다. 생각해 볼 만한 활동들을 몇 가지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죄수와 자매결연을 맺는 것
2. 개인적 위기를 만난 친구를 도와 주는 것
3. 돈을 빌려 주는 것
4. 약물 중독과 싸우는 사람을 거드는 것
5. 구조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것
6. 문맹에게 글을 깨쳐 주는 것
7. 매 맞는 여성 보호 시설에 시간을 헌신하는 것
8. 미혼모 상담소에서 상담하는 것
9. 노숙자를 위해 주방에서 일하는 것
10. 남의 차를 고쳐 주는 것
11. 집을 수리해 주는 것
12. 시각 장애자를 위해 녹음해 주는 것
13. 질병의 치료약을 연구하는 것
14. 컴퓨터 시스템 재구성을 도와 주는 것
15. 피곤한 부모들의 자녀를 봐 주는 것

 
내 욕구를 채우려는 봉사가 아니라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먼저 가족들부터 즐거이 돌봐야 한다.
 
젊은 아버지는 세상을 바꾸는 일이 자기 집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박애주의자들은 선지자다

남을 돌보는것은 선지자적 행위이다. 우리는 자기 중심적 동물인지라 남에게 관심을 품는다는 것은 비본성적 반응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초자연적 손길에 대한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박애주의자들이야말로 아주 가시적 방법으로, 즉 긍휼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냄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는 증인이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 인간의 본성적 반응은 이기적이다. 성경에 그런 모습이 많이 나온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좌우 양편에 앉고 싶어했고 나머지 제자들은 거기에 분개했다. 야곱은 음모를 꾸며 에서의 장자권을 가로챘고, 롯은 제일 좋은 땅을 선취했다. 여리고로 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다친 사람을 못본 척 했다.
 
'선지자적' 긍휼은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와야 한다. 즉 하나님이 나를 한 없이 사랑하심을 알기에 남들을 돌보는 것이라야 한다.
 

박애주의 영성의 유혹을 살펴보자

 


 

박애주의 영성의 유혹

판단

남을 돌보는 것이 영의 양식이 된다면 마르다의 교훈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칫 묵상주의자들은 '너무 거룩해 실생활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발 앞에 앉아 경배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마르다에게 아주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
 
박애주의 영성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판단해도 좋다는 통행증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돌보도록 부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본분을 다하는 길은 각기 다를 수 있다.
 
타인의 예배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다.
 

이기적 동기로 남을 섬김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봉사 욕구를 느낄 수 있다. 영성으로서의 긍휼은 남에게 다가감으로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한다. 마음에 사랑이 넘쳐 주변 사람에게 흘러가는 것이다.
 
반면 질환으로서의 긍휼은 사실상 탈취 행위다. 그것은 기만 행위다. 상대를 사랑하되, 보상으로 자신을 사랑하거나 의존하게 만들려고 그리하기 때문이다.
 

편협한 정의

행동주의 영성과 박애주의 영성에는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을 수 있다. 사실 긍휼 사역을 하다가 행동주의자로 전향하는 사례가 왕왕 있다. 도심지 빈민을 돌보던 사람은 결국 그 일에 방해가 되는 정부 구조의 개혁 작업에 뛰어들 수 있다.
 
박애주의자들은 행동주의자의 동기를 판단하려는 유혹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둘은 함께 일할 수 있다. 한 쪽에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힘 쓰는 동안 다른 한 쪽에서는 문제가 풀릴 때까지 위안을 베풀 수 있다. 긍휼의 정의가 편협해 결국 문제 해결을 위한 장기적 돌봄과 문제 경감을 위한 단기적 돌봄의 구분을 놓치지 않도록 조심하라. 하나님 나라 사역에는 양쪽 다 필요하다.
 

측근 사람들을 무시함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열정도 좋지만 하나님이 가정에 우선 순위를 두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내 욕구를 채우려는 봉사가 아니라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먼저 가족들부터 즐거이 돌봐야 한다. 아이들 돌보는 것을 자기 예배의 중심부로 여길진대 어린 자녀들을 둔 젊은 주부의 시각은 일대 변혁을 일으킬 것이다.
 
젊은 아버지는 세상을 바꾸는 일이 자기 집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성경에서의 종교 행위

우리는 종교 행위라면 일단 수상쩍게 여기지만, 그 중 다수를 하나님이 제정하셨다는 (그리고 때로 명령하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구약 족장들의 삶의 특징이 그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구원'을 부르짖은 신약의 투사들도 특정 종교 행위를 열심히 실천했다. 물론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살찌우기 위해서였다. 종교 행위란 인간이 영적 진리를 구체화하는 길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거룩한 종교 행위'의 전통이 즐비하다.

 

아브라함은 단을 쌓음으로 믿음을 표현했다. 이스라엘의 종교를 정형화하기 시작하실 무렵 하나님은 우상 숭배를 배격하시고 대신 모세에게 흙으로 번제단을 만들 것을 명하셨다.

 

하나님은 종교 행위를 배척하신 것이 아니라 그 방향을 조정하셨다. 에스라도 전통주의자였다. 그는 율법을 연구하고 그 규례를 가르쳤다. 금식을 선포했다. 제사를 드렸다. 죄를 애통하며 자백했다. 율법을 공적으로 낭독했다.

 

예수님은 규례대로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셨다. 베드로와 요한은 규칙적으로 정해진 기도 시간을 지켰다. 사도 바울도 여전히 빌립보에서 안식일날 강가에서 기도하는 종교 관행을 지켰다. 그는 결례의 의식도 자원하여 치렀다.

 

성경의 인물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정한 종교 행위로 양분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도 친히 모본을 통해 밝혔다.

 

전통주의 영성의 세 가지 요소를 살펴보자

 


 

전통주의 영성의 세 가지 요소

의식 (또는 예배 형식)

의식의 힘은 간단히 말해 강화된 행동의 힘이다. 어떤 의식들이 가장 적절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개신교, 천주교, 동방정교 그리스도인들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겠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의식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전통주의자들에게는 축일과 절기를 지키는 일, 성경을 큰 소리로 낭독하는 것, 시편을 읽는 것, 기도의 일정한 형식에 따라서 기도하는 것, 정해진 기도 시간이 영적 양분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

 

상징 (또는 중요한 이미지)

상징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커다란 어려움 중 하나인 기억력 부족의 문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상징은 바른 삶에 필수 불가결한 이 '도덕적 기억'을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나님은 상징의 사용을 인정하셨다. 그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희생

희생은 기독교의 심장이다. 최고의 희생이 되신 주님을 닮고 싶은 이들은 반드시 깨달아야 할 부분이다. 희생은 우리의 이상적이고 종종 낭만적인 경배의 표현을 현실에 접목시킨다.

 

예배는 단지 감정의 표출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우리를 의지의 헌신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구약 전체를 통해 희생의 개념을 인정하신다. 예수님은 신약 시대에 희생 제도에 참여하셨고 궁극적으로 친히 희생 제물이 되셨다. 물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동물 제사는 폐기되었다.

 

그러나 원리는 여전히 살아있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그들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권했다. 문맥상 그것은 우리의 영적 은사를 드려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라는 권고일 것이다.

 

전통주의 영성의 유혹을 살펴보자

 


 

전통주의 영성의 유혹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섬김

실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한동안 종교적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 가능하다. 사무엘이 이 위험의 좋은 예다.

 

삼상 3:1에는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겼다"고 했지만 삼상 3:7에는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고 되어 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종교 의식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종교와 종교인들이 가득하다. 종교는 신앙에 도움이 될 수 있으나 신앙의 대용품은 아니며 따라서 절대 신앙과 대치될 수 없다. 마음과 생각과 뜻의 의미있는 표현이 깊고 영속적인 신앙과 결합되지 않을 때 그것은 생명력을 잃고 만다.

 

사회적 본분의 무시

다른 몇몇 영적 기질과 마찬가지로 전통주의자들은 신앙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신앙의 사회적 본분을 망각할 수 있다. 거룩함을 가꾸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경고를 잊지 말라.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릴르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찌로다!"

 

예수님도 속빈 강정 같은 종교를 경고하셨다. 알맹이 없는 종교는 위선이라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그것은 우리를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게' 만든다.

 

남을 판단함

신성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임을 전통주의자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베드로는 음식의 종교적 금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나가지 못했다. 한낮의 생생한 환상을 통해서야 그는 그 금기를 버릴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 사역을 평생 소명으로 받은 만큼 종교 의식을 참된 신앙의 척도로 내세우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했다. 그는 롬 14장골 2:16-17에서 종교 의식이란 남을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세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함을 분명히 밝힌다.

 

기계적 반복

의식의 반복에 생생한 신앙이 배어들면 선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마음이 실리지 않은 의식은 공허한 몸놀림이 되어 우리 영혼을 위선으로 덮을 수 있다.

 

의식은 변화될 수 있다. 개인적 의식은 특히 그렇다. 한 의식이 생기를 잃었거든 다른 의식으로 바꾸는 것도 좋다 (물론 공동체 예배가 아니라 개인의 예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의식의 신격화

어떤 상징과 의식도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은 없다. 상징이란 숨은 실체를 대변하는 것이다. 상징은 신비의 세계를 일깨우기 위해 존재한다. 본래의 의미가 상실되면 상징은 만료된 상품권처럼 더 이상 가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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