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임을 압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를 참모습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에게 이런 소망을 두는 사람은 누구나, 그가 깨끗하신 것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요일 3:1-3 [새번역]

 


 

여정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제자들과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은 인간의 몸으로 이미 오신 그리스도와 다시 부활하실 그리스도 사이를 소망과 절망을 왔다갔다 하며 살아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과 승리로 그들에게 나타나셨고,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며 그들 곁을 떠나셨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언제나 그들과 함께해주셨다.

 

우리의 삶도 제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여정'이란 인간의 몸으로 사랑을 보이신 그리스도와 다시오실 주님, 그 사이를 살아내는 삶의 과정, 이미 오신 주님(Already)이제 오실, 아직 오시지 않은 그리스도(Yet) 사이를 살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도 소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앞일을 모른다. 심지어는 우리의 믿음과 신앙도 확신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권리는 오직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뻐하고 만족감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라고 일컬어주시고, 사랑해주시기 때문이다. 때로는 믿음이 약해질 수 있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몸으로 보이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으로 날마다 소망을 가지고 회복될 수 있고,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과 삶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신뢰하는 과정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영의 세계와 물질 세계, 두 세계의 시민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먼저는 영의 세계 즉,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그 다음이 물질 세계의 시민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를 '나그네'라고 표현한다.

 

21.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출 22:21 [개역개정]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신 10:19 [개역개정]

 


 

나그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그네였다. 이집트 땅에서부터 광야, 그리고 가나안 땅까지, 가나안 땅에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땅들을 얻기 위해 어느 한 곳에 메어있지 않고 움직였다. 후에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고, 다시 돌아오고, 로마의 식민지배를 통해 어느 한 곳에 머물지 못했다.

 

구약과 신약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여러 나그네들이 있다. 난민, 이주민, 외부에서 새로 온 인원 등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모두가 나그네이다.

 

우리는 월세든, 전세든, 자가든 집이 있고, 직장이 있고, 학교가 있고, 교회라는 건물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넓은 시선으로 본다면 우리도 나그네이다. 정확히 말하면 나그네임을 알고, 나그네로 살아가야한다.

 

우리는 물질 세계의 시민이기 전에 영의 세계(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물질을 입어 살고 있는 지금 이 물질 세계에서는 나그네라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알고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겐 다른 것들을 배척하거나 하나님께로 벗어난 것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는 피해야할 것이다.

 

아쉽게도 본인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는 사람들 중에는 Stranger Phobia가 꽤나 있는 듯하다. 문자 그대로 '낯선 사람에 대한 공포(혐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낯선 사람들 특히, '지극히 작은 자'에게 일부로 가셨고, 그들과 사귐을 가지셨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오늘날 우리가 해야하는 사랑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모습에서는 본인과는 다른 것에 대한 혐오가 심각한 것 같다. 텃세가 심하고, 본인들이 사랑하는 것만 사랑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다.

 

1.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2. 머리 위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
3.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림과 같구나. 주님께서 그곳에서 복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다.
시 133:1-3 [새번역]

 


 

의지적 사랑

낯선 것들에 대한 공포(혐오)는 떨쳐내기 힘들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각자가 각자의 몸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드셨기 때문에, 각자의 몸을 지키기 위해 변화되는 것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변화가 있으면 그 변화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힘이 생기거나 그 변화를 방해하는 무언가가 생긴다. 관성, 렌츠의 법칙, 열역학 제 2법칙 등을 보면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생기는 '낯선 것들에 대한 공포(혐오)'를 우리는 의지적으로 끊어내야,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의지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즉 '헤세드의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우리 모두는 이 땅에서 나그네이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의지해야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 영원까지 사귈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낯선 것들에 대한 공포(혐오)를 내려놓고, 사랑을 연합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아름다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시편에서의 다윗의 고백과 같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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