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에 화려한 하나님

하나님의 천국 영광에 대한 성경 기사들은 아주 수려할 뿐 아니라 최소한 조용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한 예로 에스겔이 기록한 체험을 생각해 보라. 그는 폭풍을 느낀다.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는 것이 보인다. 신기한 형상과 웅장하고 휘황한 사파이어 보좌도 보인다. 그는 크게 울리는 소리요란한 물살 같은 날개 소리를 듣는다.
 
에스겔은 이어 하나님의 명에 따라 꿀 같이 단 두루마리를 먹는다. 다 끝난 후에도 에스겔은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 채, 감각의 맹공이 너무 강했으리라, 충격 속에 앉아 7일을 보낸다.
 
겔 10장에도 비슷한 출현이 나온다. 에스겔은 불타는 숯불, 영화로운 광채, 요란한 소리, 성전에 가득한 구름, 신기한 광경과 동작, 황옥처럼 빛나는 바퀴, 네 얼굴의 그룹들을 경험한다.
 
성전에 영광이 돌아오자 성경은 다시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이 그 영광으로 인해 빛났다고 말한다. 어찌나 장대한 광경인지 에스겔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나타나신 요한계시록의 경험도 매우 감각적인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자 요한은 그것을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이라 묘사했다. 예수님의 머리와 털은 '희기가 흰 양털 같고 ··· 그의 눈은 불꽃같고', 예수님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예수님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았다. 해를 쳐다보려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햇빛이 너무 밝아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바로 요한이 그랬다.

"내가 ··· 그 발아래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하나님의 이런 영광의 모습은 요즘 흔히 축하 카드에 많이 나오는 얌전하고 조용한 예수님 그림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런 그림은 십자가에서 고난받아 상하고 피 흘리신 예수님과도 전혀 닮은 구석이 없다.
 
침묵만이 경건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천국이 약간 불편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것이 우리가 감각주의 영성에서 배우는 교훈이다.
 
우리의 오감은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감각을 통한 즐거움은 사탄의 착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이디어였다.
 
우리 각자 안에는, 미의 존재 앞에 감탄하는 뭔가가 있다. 그것이 초월적 천국에 대한 우리 갈망의 찰나적 단면이라고 느껴진다. 그런 눈을 가질 때 예배의 감각적 측면에 마음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감각 깨우기

 


 

감각 깨우기

청각

예배에 음악을 사용하라는 성경의 권고는 놀랄 일이 못된다.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은 언어와 음악이 합해지면 언어만 있을 때보다 두뇌에 더 자극이 된다는 것을 아신다.
 
아주 현실적 의미에서, 회중은 설교 때보다 특별 음악 순서 때 더 '살아 있을' 수 있다. 가르침은 잊어버려도 노래 가사는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다.
 
루터는 성경이 본래 읽기보다는 듣도록 된 책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가장 잘 변화되고 도전 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루터의 통찰의 타당성이 과학으로 입증되고 있다. 성경을 그냥 읽기보다는 읽혀지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의 생각은 더 활성화 된다.
 

후각

냄새는 기억을 굳혀줄 수 있다.
 
구약 시대에 향이 예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냄새의 바로 그런 특성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익숙한 냄새는 예배자에게, 예배가 유난히 풍성했던 때를 떠올려 줄 수 있다. 예배 후 남아 있는 향기는 신자에게 예배의 경험을 되살려 준다. 그렇게 한동안 지나면 신자는 냄새에 조건화되어 하나님의 임재에 의식적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향품의 헌물을 모아 냄새 좋은 향을 만들라고 명하셨다. 아론은 아침마다 향을 피워야 했다. 엘리와 솔로몬은 향을 사르는 일이 중단되지 않게 했다. 향기로운 향을 만드는 구체적 지침은 출 30장에 나와 있다.
 
하나님은 말라기에서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라고 예언하신다.
 
아기 예수에게 드려진 예물 중에도 유향이 있었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향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성도들의 기도와 끊임 없이 올려진다. 시 141:2에는 향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성경에 분향의 부정적 사례도 등장하지만 그것은 우상 숭배와 연관된 경우이거나 타락한 신앙 속에 드려진 경우다. 거부된 것은 향의 오용이지 사용 자체가 아니다.
 
기도에 몰입하기 힘든 경우 신자들은 개인적으로 낯익은 냄새를 써서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촉각

기도 중에 깨어 있기 힘들거나 마음이 어지럽다는 하소연을 나는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자주 듣는다. 새벽에 특히 그렇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작은 물건을 챙겨 손에 쥐고 한다면 기도가 한결 쉬워질 수 있다.
 
페이퍼 클립은 위태로운 부부관계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할 때 좋고 고무 밴드는 유연한 마음을 위해 기도할 때 좋다.
 

시각

시각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도 클 것이다. 우리 대뇌피질의 자그마치 3분의 1이 시각 처리에 할애된다. 그 정도면 인간 두뇌의 최고 수준이다. 연구진들은 시각의 활용으로 의지에 영향을 입힐 수 있다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의지는 믿음대로 살려는 우리의 헌신과 직결된다.
 
기독교 예배와 기도에 시각이 사용된 것은 성육신에서 기원한다. 물론 시각은 구약시대에도 예배의 필수 요소였다.
 
이스라엘의 예배 형태를 제정하실 때 하나님은 특별히 브살렐과 오홀리압 두 사람에게 재능을 주시고 지명하셔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셨다. 이 두 장인은 금은과 놋과 나무로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그들은 세마포에 수놓는 기술과 정교하고 수려한 베를 짜는 기술도 익혔다.
 
완성된 성전의 모습에 예배자들은 숨이 멎을 듯했을 것이다. 하나님께 아름다움은 중요하다. 성전 건축에 든 지출은 향기로운 제물이었고, 재능을 바쳐 성전을 지은 자들은 큰 존경을 얻고 '하나님의 신이 충만한' 자로 통했다.
 
그림이나 성상의 형태로 시각을 사용해온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성인의 순종을 상징하는 성상의 모습은 정교회 그리스도인이 어려운 성경 말씀에 마침내 '예'로 반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런가하면 성상에 나타난 이미지는 그리스도인을 기도로 이끌어줄 수도 있다. 성상에서 기도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예배 형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성상이 대변하는 실체를 떠올림으로 기도에 더 잘 집중할 수 있다.
 
아이들은 주의가 쉽게 산만해지기 때문에 기도의 집중을 위해 눈을 감게 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어른들의 경우 남을 위해 기도할 때 상대방 (혹은 사진) 을 보며 기도하면 기도의 능력이 더할 수 있다.
 
하늘을 보면서 예배하거나, 기도하거나, 시편을 외우면 방해되기는커녕 오히려 말의 진실성이 더해질 수 있다. 시각의 영향은 막대한 것인 만큼 예배에 통합되는 것이 절대 바람직하다.
 
창의적 그리스도인들은 시각 요소를 기도에 통합할 수 있는 자기만의 길을 찾을 줄 안다.
 

미각

맛의 비유로 표현되는 말이 많을 정도로 미각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다. 경험이 없어 뭘 모르면 '맛을 봐야 안다'고 하고, 반대로 경험이 알차면 '맛을 톡톡히 봤다'고 한다.
 
마음에 '쓴' 뿌리가 있는 사람은 심술을 부리며 양심을 품는다. '달콤한' 추억은 아주 아름다운 추억이다. 취직은 되었으나 타지로 떠나야 한다면 그것은 '쓴맛단맛'다 보는 셈이다.
 
두 연구자는 이렇게 말했다.

"소위 맛이라는 지각은 연상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위력과 강도가 아주 커 다른 모든 영억의 경험에도 맛의 언어가 자연스레 전이되는 듯 보인다."

 
미각을 사용해 영적 생활에 유익을 얻지 말아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진짜 포도주가 내 성찬의 체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앞서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성찬의 감각적 측면 때문에 자칫 성찬이 요구하는 헌신을 도외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맛은 건강한 영혼의 성찬 체험을 강화시켜 줄 수 있다. 서둘러 치르지 않고 시간적 여유를 갖는다면 특히 그렇다.
 
맛과 관련된 성경 말씀이 꽤 있다. 마 7:16은 열매로 사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다음에 유난히 맛있는 (혹은 썩은) 사과나 오렌지를 베어 물 때, 이 말씀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자처하셨고 우리를 이 땅의 소금이라 부르셨다.
 

감각주의의 영성의 유혹을 살펴보자

 


 

감각주의의 영성의 유혹

알맹이 없는 예배

감각은 우리를 속일 수 있다. 음악을 통해 감정이 고조될 때 특히 그렇다. 생각은 딴 데 가 있으면서 입으로나 주님 앞에 엎드리겠다고, 땅 끝까지 주의 이름을 전하겠다고,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약속한다.
 
햄버거를 주문할 때 만큼이나 무감각하게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배 중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미의 우상화

피조 세계의 감상에 애착이 스며들 때 자연주의자들이 우상 숭배에 빠질 수 있는 것처럼 정교한 성전이나 아름답게 그려진 성상의 감상에 애착이 개입되면 감각주의자들도 우상 숭배에 빠질 수 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일개 천사가 사람들 앞에 나타나면 성숙한 선지자들조차 그들을 예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들은 참되고 순결한 예배를 받으시기 합당한 유일한 분으로부터 우리 마음을 빼앗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참된 임재에 들어서지도 않은 채 극도로 아름다운 예배 의식의 감각적 체험에 만족해 자리를 떠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예배를 예배함

불행히도 우리는 오감을 사용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 오감을 사용해 예배를 예배하는 자리로 자칫 빗나갈 수 있다.
 
감각적 자극의지의 참된 헌신을 혼동할 때, 감각적 예배는 미숙한 것이 되어 버린다.
 

성경에 나오는 박애주의자들

박애주의자들은 자신의 소명과 기질을 이해하려 함에 있어 특히 두 사람을 살펴볼 수 있다. 모르드개와 예수다.
 

모르드개

에스더서에 그려진 모르드개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을 깊이 정성껏 돌보고 아낌 없이 에너지를 쏟아 도와 주는 이의 초상이다.
 
모르드개의 첫 번째 그림은 에 2:7에 나온다. 거기서 우리는 부모의 강제 이주로 인해 고아가 된 에스더를 거두는 모르드개를 볼 수 있다.

"그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같이 양육하더라."

 
에스더를 위한 모르드개의 수고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가 왕궁에 들어간 후에도 그는 늘 에스더가 잘 지내는지 깊은 관심으로 지켜 보았다. "모르드개가 날마다 후궁 뜰 앞으로 왕래하며 에스더의 안부와 어떻게 될 것을 알고자 하더라."
 

예수

유사 이래 진정 온전한 인간은 예수 뿐이었다. 그래서 예수에게는 9가지 영적 기질이 모두 보인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은 긍휼의 완전한 표상이었다. 그분의 삶은 특히 그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예수님은 병든 자, 귀신들린 자, 잃어버린 영혼을 돌보셨다. 그분은 제자들에게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셨고, 친히 무리를 보시며 몹시 측은히 여기셨다.
 

박애주의 영성의 여러 형태를 살펴보자

 


 

박애주의 영성의 여러 형태

우리는 박애주의 영성의 정의를 환자들에 대한 간호로 제한시킬 필요가 없다. 이웃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은 얼마든지 많으며, 박애주의 영성은 그것을 잘 통합한다.
 
노인의 침상 옆에 말 없이 앉아 있어 주는 것도 긍휼일 수 있다. 자원봉사 구조대에서 일하거나 집을 수리해 주는 것도 긍휼일 수 있다. 생각해 볼 만한 활동들을 몇 가지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죄수와 자매결연을 맺는 것
2. 개인적 위기를 만난 친구를 도와 주는 것
3. 돈을 빌려 주는 것
4. 약물 중독과 싸우는 사람을 거드는 것
5. 구조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것
6. 문맹에게 글을 깨쳐 주는 것
7. 매 맞는 여성 보호 시설에 시간을 헌신하는 것
8. 미혼모 상담소에서 상담하는 것
9. 노숙자를 위해 주방에서 일하는 것
10. 남의 차를 고쳐 주는 것
11. 집을 수리해 주는 것
12. 시각 장애자를 위해 녹음해 주는 것
13. 질병의 치료약을 연구하는 것
14. 컴퓨터 시스템 재구성을 도와 주는 것
15. 피곤한 부모들의 자녀를 봐 주는 것

 
내 욕구를 채우려는 봉사가 아니라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먼저 가족들부터 즐거이 돌봐야 한다.
 
젊은 아버지는 세상을 바꾸는 일이 자기 집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박애주의자들은 선지자다

남을 돌보는것은 선지자적 행위이다. 우리는 자기 중심적 동물인지라 남에게 관심을 품는다는 것은 비본성적 반응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초자연적 손길에 대한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박애주의자들이야말로 아주 가시적 방법으로, 즉 긍휼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냄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는 증인이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 인간의 본성적 반응은 이기적이다. 성경에 그런 모습이 많이 나온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좌우 양편에 앉고 싶어했고 나머지 제자들은 거기에 분개했다. 야곱은 음모를 꾸며 에서의 장자권을 가로챘고, 롯은 제일 좋은 땅을 선취했다. 여리고로 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다친 사람을 못본 척 했다.
 
'선지자적' 긍휼은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와야 한다. 즉 하나님이 나를 한 없이 사랑하심을 알기에 남들을 돌보는 것이라야 한다.
 

박애주의 영성의 유혹을 살펴보자

 


 

박애주의 영성의 유혹

판단

남을 돌보는 것이 영의 양식이 된다면 마르다의 교훈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칫 묵상주의자들은 '너무 거룩해 실생활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발 앞에 앉아 경배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마르다에게 아주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
 
박애주의 영성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판단해도 좋다는 통행증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돌보도록 부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본분을 다하는 길은 각기 다를 수 있다.
 
타인의 예배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다.
 

이기적 동기로 남을 섬김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봉사 욕구를 느낄 수 있다. 영성으로서의 긍휼은 남에게 다가감으로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한다. 마음에 사랑이 넘쳐 주변 사람에게 흘러가는 것이다.
 
반면 질환으로서의 긍휼은 사실상 탈취 행위다. 그것은 기만 행위다. 상대를 사랑하되, 보상으로 자신을 사랑하거나 의존하게 만들려고 그리하기 때문이다.
 

편협한 정의

행동주의 영성과 박애주의 영성에는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을 수 있다. 사실 긍휼 사역을 하다가 행동주의자로 전향하는 사례가 왕왕 있다. 도심지 빈민을 돌보던 사람은 결국 그 일에 방해가 되는 정부 구조의 개혁 작업에 뛰어들 수 있다.
 
박애주의자들은 행동주의자의 동기를 판단하려는 유혹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둘은 함께 일할 수 있다. 한 쪽에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힘 쓰는 동안 다른 한 쪽에서는 문제가 풀릴 때까지 위안을 베풀 수 있다. 긍휼의 정의가 편협해 결국 문제 해결을 위한 장기적 돌봄과 문제 경감을 위한 단기적 돌봄의 구분을 놓치지 않도록 조심하라. 하나님 나라 사역에는 양쪽 다 필요하다.
 

측근 사람들을 무시함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열정도 좋지만 하나님이 가정에 우선 순위를 두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내 욕구를 채우려는 봉사가 아니라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먼저 가족들부터 즐거이 돌봐야 한다. 아이들 돌보는 것을 자기 예배의 중심부로 여길진대 어린 자녀들을 둔 젊은 주부의 시각은 일대 변혁을 일으킬 것이다.
 
젊은 아버지는 세상을 바꾸는 일이 자기 집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성경에서의 종교 행위

우리는 종교 행위라면 일단 수상쩍게 여기지만, 그 중 다수를 하나님이 제정하셨다는 (그리고 때로 명령하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구약 족장들의 삶의 특징이 그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구원'을 부르짖은 신약의 투사들도 특정 종교 행위를 열심히 실천했다. 물론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살찌우기 위해서였다. 종교 행위란 인간이 영적 진리를 구체화하는 길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거룩한 종교 행위'의 전통이 즐비하다.

 

아브라함은 단을 쌓음으로 믿음을 표현했다. 이스라엘의 종교를 정형화하기 시작하실 무렵 하나님은 우상 숭배를 배격하시고 대신 모세에게 흙으로 번제단을 만들 것을 명하셨다.

 

하나님은 종교 행위를 배척하신 것이 아니라 그 방향을 조정하셨다. 에스라도 전통주의자였다. 그는 율법을 연구하고 그 규례를 가르쳤다. 금식을 선포했다. 제사를 드렸다. 죄를 애통하며 자백했다. 율법을 공적으로 낭독했다.

 

예수님은 규례대로 안식일마다 회당에 가셨다. 베드로와 요한은 규칙적으로 정해진 기도 시간을 지켰다. 사도 바울도 여전히 빌립보에서 안식일날 강가에서 기도하는 종교 관행을 지켰다. 그는 결례의 의식도 자원하여 치렀다.

 

성경의 인물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일정한 종교 행위로 양분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도 친히 모본을 통해 밝혔다.

 

전통주의 영성의 세 가지 요소를 살펴보자

 


 

전통주의 영성의 세 가지 요소

의식 (또는 예배 형식)

의식의 힘은 간단히 말해 강화된 행동의 힘이다. 어떤 의식들이 가장 적절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개신교, 천주교, 동방정교 그리스도인들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겠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은 의식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전통주의자들에게는 축일과 절기를 지키는 일, 성경을 큰 소리로 낭독하는 것, 시편을 읽는 것, 기도의 일정한 형식에 따라서 기도하는 것, 정해진 기도 시간이 영적 양분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

 

상징 (또는 중요한 이미지)

상징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커다란 어려움 중 하나인 기억력 부족의 문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상징은 바른 삶에 필수 불가결한 이 '도덕적 기억'을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하나님은 상징의 사용을 인정하셨다. 그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로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희생

희생은 기독교의 심장이다. 최고의 희생이 되신 주님을 닮고 싶은 이들은 반드시 깨달아야 할 부분이다. 희생은 우리의 이상적이고 종종 낭만적인 경배의 표현을 현실에 접목시킨다.

 

예배는 단지 감정의 표출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우리를 의지의 헌신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구약 전체를 통해 희생의 개념을 인정하신다. 예수님은 신약 시대에 희생 제도에 참여하셨고 궁극적으로 친히 희생 제물이 되셨다. 물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동물 제사는 폐기되었다.

 

그러나 원리는 여전히 살아있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그들 자신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권했다. 문맥상 그것은 우리의 영적 은사를 드려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라는 권고일 것이다.

 

전통주의 영성의 유혹을 살펴보자

 


 

전통주의 영성의 유혹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을 섬김

실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한동안 종교적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 가능하다. 사무엘이 이 위험의 좋은 예다.

 

삼상 3:1에는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겼다"고 했지만 삼상 3:7에는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고 되어 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종교 의식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종교와 종교인들이 가득하다. 종교는 신앙에 도움이 될 수 있으나 신앙의 대용품은 아니며 따라서 절대 신앙과 대치될 수 없다. 마음과 생각과 뜻의 의미있는 표현이 깊고 영속적인 신앙과 결합되지 않을 때 그것은 생명력을 잃고 만다.

 

사회적 본분의 무시

다른 몇몇 영적 기질과 마찬가지로 전통주의자들은 신앙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신앙의 사회적 본분을 망각할 수 있다. 거룩함을 가꾸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경고를 잊지 말라.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릴르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찌로다!"

 

예수님도 속빈 강정 같은 종교를 경고하셨다. 알맹이 없는 종교는 위선이라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그것은 우리를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게' 만든다.

 

남을 판단함

신성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임을 전통주의자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베드로는 음식의 종교적 금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나가지 못했다. 한낮의 생생한 환상을 통해서야 그는 그 금기를 버릴 수 있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 사역을 평생 소명으로 받은 만큼 종교 의식을 참된 신앙의 척도로 내세우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했다. 그는 롬 14장골 2:16-17에서 종교 의식이란 남을 판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세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함을 분명히 밝힌다.

 

기계적 반복

의식의 반복에 생생한 신앙이 배어들면 선한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마음이 실리지 않은 의식은 공허한 몸놀림이 되어 우리 영혼을 위선으로 덮을 수 있다.

 

의식은 변화될 수 있다. 개인적 의식은 특히 그렇다. 한 의식이 생기를 잃었거든 다른 의식으로 바꾸는 것도 좋다 (물론 공동체 예배가 아니라 개인의 예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의식의 신격화

어떤 상징과 의식도 그 자체로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은 없다. 상징이란 숨은 실체를 대변하는 것이다. 상징은 신비의 세계를 일깨우기 위해 존재한다. 본래의 의미가 상실되면 상징은 만료된 상품권처럼 더 이상 가치가 없다.

 

행동주의 영성

성경에는 행동주의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모세, 엘리야, 엘리사, 하박국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을 통해 행동주의 영성의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대결로 하나님을 예배한다. 사회 개혁에 참여한다던가, 누군가의 회개를 촉구한다.

 

행동주의 영성의 유혹을 살펴보자

 


 

행동주의 영성의 유혹

판단적 태도

행동주의자들은 자신이 거룩해질수록 죄를 더 미워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맞다. 그러나 행동주의자들이 종종 오해하는 부분은, 논리를 비약시켜 자신이 거룩해질수록 죄인들을 그만큼 용납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기독교 고전을 좋아하다 깨달은 것이 있다. 대다수 영성 작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이 있다. 믿음이 성숙할수록 우리는 자기 삶의 죄를 더욱 버리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죄인들을 더욱 긍휼히 여긴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거룩한 증오뿐 아니라 우리의 사랑도 자라야 한다. 자기 의비판적 태도는 그리스도의 긍휼을 닮은 모습이 아니다. 행동주의자들이 보기에 죄를 정말 미워하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다시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과도히 보상하려 죄인에 대한 사랑에 인색해질 수 있다.

 

야망과 섹스

관찰과 전기를 통해 보건대 야망의 수위와 성적 유혹 사이에는 영적으로 직접적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남자들의 경우 특히 그렇다.

 

야망이란 그 뿌리를 깊이 파보면 무력감에 대한 싸움, 통제권에 대한 싸움일 때가 많다.

 

야망의 사람은 본래 이기적이기도 하다. 타인의 복지를 우려한다는 명분이 있기에 이들의 통제권 추구는 제동을 모르며 그래서 필시 정욕의 비옥한 온상이 된다. 이렇듯 정욕은 야심만만한 영혼 안에서 아주 편안한 집을 얻을 수 있다.

 

엘리트 의식과 적의

행동주의 영성의 양식은 대결이므로 행동주의자는 남들이 대결을 그토록 겁내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시위나 노방전도라면 생각만으로도 몸이 움츠러드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큰 흥분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여기서 엘리트 주의적 태도가 나올 수 있다.

 

활동과 통계 수치에 집착함

장난감이 뭔가에 끼어 빠지지 않거나 매듭이 좀처럼 풀리지 않아 속상할 때 어린아이는 그럴수록 더 거기에 집착할 수 있다. 대개 상황은 더 악화되기 마련이다.

 

진실성노력은 든든한 두 다리다. 그러나 의자에 안정성을 주려면 두 다리만으로 부족하다. 행동주의자들에게는 진실성과 노력 외에도 신중한 기도가 필요하다.

 

개인적 성화에 소홀함

예수님은 이웃의 눈에서 티를 빼내기 전 먼저 우리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라고 밝히 말씀하셨다. 사회 개혁은 사회를 개혁하려는 개인의 삶에서 시작된다.

 

사회 참여는 절대 개인적 성화를 대치할 수 없다. 사실 개인의 성화 없는 사회 참여는 득 못지 않게 해가 될 수 있다. 위선자로 드러나면 그만큼 대의를 그르치기 때문이다.

 

성경과 금욕주의 영성

고독한 금욕주의자 하면 당장 세례 요한이 떠오르지만, 예수님도 그런 성향이 있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예수님은 고독과 금식으로 40일을 보내셨다.

 

그분은 기도란 은밀한 곳에서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고, 언젠가는 제자들이 금식할 것을 전제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역의 어려운 순간마다 다시 고독을 찾으셨다. 세례 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으셨을 때와 무리에게 쫓기실 때가 좋은 예다.

 

금욕주의 영성의 세 가지 세계를 살펴보자

 


 

금욕주의 영성의 세 가지 세계

고독

우리는 신앙의 표현을 위해 굳이 사막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 내적 초연함이 있다면 가장 북적이는 도시 한복판에서도 외로운 사막을 찾을 수 있다.

 

금욕주의자들은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 매일 필요할 수도 있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그 사실을 알아 주어야 한다.

 

청빈

감각주의자들은 오감을 통해 하나님께 끌리지만, 금욕주의자들은 오감에 오히려 방해 받을 때가 많다. 그래서 그들은 감각을 차단하려 한다. 수도사들은 기도와 금식을 방해 받지 않기 위해 감각의 자극이 낮은 환경을 고르곤 했다.

 

엄격함

기독교의 참된 금욕은 고난이나 자기 부인을 목표로 구하지 않고 수단으로, 즉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다른 것을' 사랑하는 길로 구한다.

 

율법주의에 젖은 바리새인들은 불가능할 정도로 높은 기준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에 게 의무적으로 지키게 하면서도 자신들은 뒤에서 호사를 누렸다. 참된 금욕주의자는 자신에게는 엄격하되 타인을 대할 때는 초자연적 너그러움으로 대한다.

 

금욕주의 영성의 유혹을 살펴보자

 


 

금욕주의 영성의 유혹

개인적 경건의 지나친 강조

스가랴서에 보면 백성들이 여러 해 동안 해오던 대로 울며 금식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여쭙는 장면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스가랴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겉치레뿐인 경건 대신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피차에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나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 것을 명하신다.

 

예수님은 고독 속에 장시간 기도하셨지만, 그것은 공적 사역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동일한 방식, 사역에 뒤따른 고독과 안식을 가르치셨다.

 

세례 요한은 금욕주의자의 역할을 취했지만, 그것 역시 지극히 공적인 사역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영적 회복에 대한 우리의 필요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우리의 본분과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고통을 위해 고통을 구함

매저키즘은 신앙 노선이 아니라 병이다. 현대 사회의 우리 많은 사람들은 욕구 충족에 익숙해 있어, 조금만 불편해도 질색하며, 즉각적 해결을 요구한다.

 

그와는 반대로, 왜곡된 자아상과 병든 심리로 인해, 고통을 위해 고통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고대 금욕주의자들이 주는 교훈도 아니고 현대 금욕주의 영성의 바른 표현도 아니다.

 

건강한 금욕주의자들은 금욕이 목표가 아니라 수단임을 분명히 한다. 금욕이 목표 자체가 될 때마다 예로부터 검증되어 온 값진 기독교 행위가 무참히 왜곡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내려는 시도

금욕주의자들이 실천하는 '영웅적' 신앙 행위는 자칫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내려는 시도가 될 수 있다. 남다르게 거룩해짐으로 하나님의 인정이나 용서를 얻어 내려는 것은 부질 없는 일이다.

 

우리의 행동과 삶,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것이다. 금식하고 땅바닥에서 자고 단순한 삶을 산다고 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더 커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금욕주의자들은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며 그분의 용서는 오늘 우리가 행하는 영적 체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완성하신 사역에 기초한 것이다.

 

열정주의 영성: 신비의 세 가지 모습

하나님이 신비로 역사하셨고, 지금도 역사하시는 방법 중 하나는 을 통해서다. 하나님이 꿈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성경에 잘 입증되어 있다. 하나님은 야곱, 요셉, 솔로몬, 다니엘에게 꿈을 통해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꿈을 통해 말씀하신 기사는 신약성경에서도 나온다. 요셉과 동방박사들이 좋은 예다. 신약에는 환상도 여러 번 나온다.

 

환상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받는다는 점에서 꿈과 다르다. 바울, 아나니아, 고넬료, 베드로는 다 환상을 받았다.

 

하나님이 꿈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개념은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한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추적하시고, 우리가 잠든 중에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한정되고 유한한 인간 실존에 대비해 무궁하고 무한하신 당신 성품의 증거를 보여 주신다.

 

기대감

열정주의자들은 기대감의 신비를 가꾸려면 아침에 일어나, 그날 자기가 섬길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좋다. 그것이 전도의 기회이든, 낙심한 신자를 격려하는 기회이든, 이런 기대감은 열정주의자들의 신앙을 활기차게 한다. 하나님의 역사를 가시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의 필요는 엄청나며 하나님은 그것을 알고 계신다. 그분과 협력하여 우리는 초자연적 방법으로 움직일 수 있다.

 

기대감을 키우는 또 다른 방법은 영적 모험에 나서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려는 희망으로 낯선 이와 대화를 시작하거나 믿음으로 미지의 상황에 들어설 때 열정주의자의 신앙은 충만해질 수 있다.

 

기도

기도보다 신비한 것이 있을까? 보이는 것을 변화시켜 달라고 보이지 않는 분께 부르짖는 것이 곧 기도다.

 

열정주의자들은 자신의 삶 속에 기도의 주머니를 만들어야 하며,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열정주의 영성의 유혹을 살펴보자

 


 

열정주의 영성의 유혹

체험을 우해 체험을 구하는 것

단순히 체험을 위해 기적 체험을 구하는 것은 우리를 그저 '도취'를 원하는 영적 약물 중독자로 만든다.

 

열정주의자들은 새로운 체험을 구하기보다 하나님을 구하고 사랑하는 데 머물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영적 체험' 자체를 위해 그것을 구할 때, 그런 체험은 실제 악해질 수 있고 악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

 

독립 성향

어떤 다른 기질보다도 열정주의 영성이야말로 신자 개개인의 책임을 감시해 줄 수 있는 든든한 교회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교회의 감시가 없는 초자연적 체험은 재난의 확실한 전조다.

 

우리의 최종 권위는 성경이지만,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이 배웠고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적용하고 있는 지혜를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감히 꿈에나 그릴 수 있는 영적 실체를 체험한 사도 바울도 친히 예루살렘 사도들의 회의 결과에 따랐다.

 

'좋은 기분'과 '좋은 예배'를 동등시하는 것

순전한 예배는 하나님께 충성과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우리 의지의 행위이다. 단지, 예배 시간 중 기분이 좋았다고 해서 적절한 방식으로 우리 의지를 올려 드렸다는 뜻은 아니다.

 

거꾸로 기분이 가라앉거나 '덤덤하다'고 해서 제대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지 않다는 뜻도 아니다. 감정이란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다. 열정주의자들이 감정을 즐기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다만, 감정에 의존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지성주의 영성에 대한 성경의 시각

모세가 축복한 레위 지파는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는' 지파였다. 레위인들은 연구하고 가르치는, 즉 지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가지 직무를 다하기 위해 다른 직무들이 면제되었다.

 

생물학 교수는 조직신학 교수와 다를 바 없이, 지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기에 자연 세계를 탐색하고 설명하는 모든 학문은 하나님의 성품을 조금이라도 밝혀 주어 우리로 그분을 더 잘 알게 해줄 수 있다.

 

설교는 일반 교회 예배의 결정적 부분이다. 설교는 예배에 앞서거나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배 자체다. 잠언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 훈련된 지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는 말씀도 많이 있다.

 

예수님도 친히 지적 성향을 보여 주셨다. 열두 살 때 그분은 성전에서 율법을 논하고 있었다. 가르침은 그분의 사역에 큰 부분을 차지했다. 사람들을 하나님께 가지 못하게 막는 지적 책략이라면 그분은 강력히 비난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 뿐 아니라 생각도 변화되어야 함을 잘 아셨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지성주의 영성의 훈련 분야를 살펴보자

 


 

지성주의 영성의 훈련 분야

지성주의자들은 신학 훈련의 기초 분야를 배워 자신의 신앙을 넓히려 애써야 한다.

 

다음은 신학 훈련의 기초 분야이다.

1. 교회사
2. 성경 연구
3. 조직신학
4. 윤리학
5. 변증학

 

지성주의 영성의 유혹을 살펴보자

 


 

지성주의 영성의 유혹

변론을 좋아함

디모데는 변론을 좋아하는 지성주의자가 아니었나 싶다. 디모데에게 보낸 바울의 두 편지에는 '신화와 끝 없는 족보에 착념하는' 자들을 삼가라는 강력한 권고가 몇 차례 나온다.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그런 사람은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이 바울이 디모데 자신에게 준 권고 못지 않게 디모데를 따르는 자들에게 준 경고이기도 하다. 그러나 디모데후서에 가면 경고가 좀 더 개인적 색채를 띤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바울은 다른 지도자 디도에게도 마찬가지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어릿거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바울은 이런 분열 조장을 아주 대단히 심각한 죄로 보았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그리스도인의 표지는 교만한 지식 자랑이 아니라 사랑과 은혜다.

 

행동 없는 지식

지성주의자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옳은 길을 아는 것으로 옳은 삶을 사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옳은 길을 알수록 언행일치의 책임이 더 커진다. 야고보는 선생들이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잠언서에 따르면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공부하여 깨달은 의의 길을 열심히 삶에 적용하는 사람이다. 바른 생각은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필수지만 바른 행동도 똑같이 필수다.

 

교만

교만은 뛰어난 지성인들의 공통된 약점이다. 그것은 무턱대고 아무나 교정해 주려는 공통된 욕구를 통해 나타난다. 다른 사람의 지적 약점을 비판하지 않고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의 자존감이 자신의 지적 우월성을 내보이는 능력에서 비롯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남달리 뛰어난 지성의 은사를 주셨거든, 교회를 섬기라고 맡겨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목소리가 아름다운 사람도 때를 못 가리고 노래한다면 얼마든지 불쾌감을 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성이 뛰어난 사람도 다른 사람들을 적절한 담론에 끌어들일 때와 장소를 모른다면 얼마든지 반감을 줄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묵상주의자들

묵상주의 영성의 역할에 대한 최고의 설명 중 하나를 베냐민 지파에 대한 모세의 예언 겸 묘사에서 찾을 수 있다.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새도록 보호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

 

'하나님의 어깨 사이에 처하는 것'이야말로 묵상주의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누리기 원하며, 갈수록 더 깊은 방식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원한다. 하나님은 감정 없이 순종하는 종보다는 다른 모든 인연을 불살라 버릴 만큼 강하고 뜨거운 사랑을 구하신다. 묵상주의자들은 우리에게 그것을 일깨워 준다.

 

행동주의 영성은 묵상주의 영성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전통주의 영성은 묵상주의 영성을 얄팍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지성주의자에게는 묵상주의 영성의 예배가 신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열정주의자에게는 묵상주의 영성의 예배가 지루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묵상주의 영성의 예배가 소중하고 값진 것이다.

 

묵상주의 영성의 행위를 살펴보자

 


 

묵상주의 영성의 행위

예수님 기도

역사적으로 묵상주의자들은 '예수님 기도'를 애용했다. 예수님 기도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아주 간단한 기도다. 때로 그보다 짤막한 형태가 사용될 수도 있다.

 

은밀한 헌신의 행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은밀한 헌신의 행위'를 권하고 싶지만 특히, 묵상주의 영성이 두드러진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은밀한 헌신의 행위란 혜택을 입는 당사자를 포함해 아무에게도 내 정체를 알리지 않고 몰래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무명으로 선물을 줄 수도 있고 누군가를 '뒤에서' 도와줄 수도 있고 카드를 보낼 수도 있다. 은밀함은 내 행위에 오직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외에 다른 동기가 없다는 증거다.

 

모든 친밀한 관계에는 비밀이 있다. 남편과 아내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둘만의 비밀이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분과 나 둘만의 비밀을 간직하는 것은 친밀함의 일면이다. 우리 쪽의 비밀이란 내가 아무도 모르게 행한 섬김일 수 있다.

 

그밖에 묵상주의 영성의 행위는 아래와 같다.

1. 춤추는 기도
2. 집중 기도
3. 마음의 기도
4. 십자가 길이 14처소
5. 묵상 기도

 

묵상주의 영성의 유혹을 살펴보자

 


 

묵상주의 영성의 유혹

균형 상실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사랑을 찾으려는 건강한 열망 때문에, 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그 사랑을 보여 주실 수 있는 방법을 제한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기뻐하기 원하시지만, 그분이 지으신 사람들과 세상 속에서 기뻐하는 것도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지으신 것과 함께 있는 즐거움이 배제되는 것이다. 건강한 묵상주의자들은 고독 속의 친밀한 기도 못지 않게 풍성한 인간 관계도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는 길임을 이해한다. 좋은 음악, 아름다운 자연, 예술, 여가에는 모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작은 축제가 담겨 있다. 그래서 우리는 피조 세계의 경이를 음미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릎 꿇고 기도할 때 못지 않게 동료 신자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자신을 계시하실 수 있다.

 

자아의 흡수

정통 기독교 범주를 벗어나는 묵상 형태들이 있으므로 묵상주의자들은 조심해야 한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르치지 않고 인간의 자아가 하나님께 흡수되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묵상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고, 우리는 언제나 인간이며, 그 둘은 절대 교차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 맺을 수 있으나 하나님 안에 흡수될 수는 없다.

 

그런 어리석은 주장은 기독교의 생각이 아니다. 그저 자신을 '비워' 진공 상태에 들어가야 한다는 식의 묵상을 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원하는 것은 속이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것이다.

 

덕을 잊음

위대한 묵상주의자들은 악을 줄이지 않고는 신앙의 진보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역사적으로 금욕주의에서 묵상의 역할이 떨어져 나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마음 속으로 세상의 죄악된 쾌락을 탐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스런 얼굴을 응시할 수는 없다. 묵상주의자들은 미숙한 심취 상태를 벗어나 자기 훈련과 절제를 통합하는 쪽으로 자라야 한다.

 

결혼한 부부가 서로 반한 상태를 벗어나 자기 희생에 기초한 헌신으로 깊어져야 하는 것처럼 묵상주의자들도 단순한 묵상을 벗어나 우리 뜻을 조정해 그리스도께 맞춰 순종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영적 체험에 중독되는 것

고대인들은 묵상을 천국의 기쁨의 맛보기로 알았다. 묵상을 이 땅에 무한정 계속될 것으로 묘사한 적은 거의 없다.

 

묵상주의자들은 이 땅의 몸에 한계가 있듯이 이 땅의 영혼과 감정에도 한계가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지금 누리는 영적 기쁨에 감사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일시적 특성도 용납해야 한다. 하나님 대신 감정을 구하는 '영적 탐식'도 조심해야 한다.

 

성경 속에 자연주의 영성

현대 문명 때문에 오랫동안 가려진 진리이긴 했지만 분명 성경은 야외에서 읽도록 된 책이다. 구약성경과 복음서의 많은 이야기와 비유는 자연에 바탕을 둔 것이다. 따라서 자연 속에서 그 의미와 힘이 되살아난다.
 
'생수의 강'이라는 표현을 프로젝터로 벽에 비추면 무언가 이상해 보이지만 빠른 물살의 강가에 서면 그 위력이 생생히 밀려온다. '푸른 초장'이라는 말도 고속도로와 스포츠 경기장에서 아득히 먼 야생 초원에 들어서면 의미가 달라진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타나심', 즉 그분이 임하신 사건은 대부분이 광야에서 일어났다. 하나님은 사막에서 하갈을, 산에서 아브라함을, 강나루에서 야곱을, 불 붙은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만나 주셨다.
 
예수님은 자주 시골에서 가르치셨다. 분명 예수님은 자연의 실물을 지적하며 가르치셨을 것이다. 새를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실 때,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새들을, 꽃의 아름다움을 말씀하실 때는 꽃을 가리키셨을 것이다. 예수는 산상수훈도 야외에서 전하셨다.
 

자연에서 얻는 영적 교훈을 살펴보자

 


 

자연에서 얻는 영적 교훈

영적 진리의 시각화

하나님께서 지으신 무한한 자연을 보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무한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연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날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캐스팅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연의 언어와 교훈'이라는 제목의 글을 남길 만큼 자연의 비유를 좋아했다. 장미에 가시가 있다는 사실은 '모든 현세의 단맛에 쓴맛도 섞여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고, 파리를 잡어먹는 거미는 '마귀와 유혹'을 나타내 주며, 바다로 흐르는 강물은 '만물이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그는 말한다.
 
우리가 듣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피조 세계를 통해 말씀하실 것이다. 책을 읽거나 설교를 듣는 당신의 시간이 고인 물처럼 정체돼 보이거든 코트와 지팡이를 들고 야외로 나가라. 거기 닫지 않는 학교가 있다.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아울러 하나님을 더 밝히 볼 것이다.
 

하나님을 더 밝히 봄

하나님은 종종 자연에서 그분 스스로를 계시하시며 우리를 만나 주신다. 기독교 신앙 고백서들과 신자들 개개인이 증거해온 성경의 진리이다.
 
아름다운 신앙의 찬송,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는 피조 세계가 우리를 하나님께로 부르는 모양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숲 속이나 험한 산골짝에서 지저귀는 저 새소리들과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은 주님의 솜씨 노래하도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하나님의 존재와 경이는 날마다 만인의 눈앞에 훤히 드러나 있다. 진리에 머리와 가슴을 열고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자연에 계시된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다. 무섭고 두려운 하나님도 계시되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비와 은혜의 하나님이자, 동시에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임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러니 땅을 비옥하게 하는 비가 열대성 폭풍이 되어 해안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봄날의 채소를 살찌우던 태양이 여름철 미약한 식물을 살라 버릴 수 있다. 여름에 우리를 시원케하는 바람이 봄날 돌풍이 되어 집을 날려 버릴 수 있다.
 
피조 세계를 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라.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과 심판도 생각하라.
 

안식을 배움

우리한테 늘 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이 필요할 때도 있다. 몸과 영을 쉬기에 자연보다 좋은 곳은 없다.
 
예수님은 분주한 사역 일정 중에도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며 힘을 얻곤 하셨다. 제자들한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셨다.
 
우리를 돌보시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피조 세계는 하나님이 우리의 추운 마음을 덮어 주시는 따뜻한 이불일 수 있다.
 

자연주의 영성의 유혹을 살펴보자

 


 

자연주의 영성의 유혹

하나님의 영적 진리를 시각화하여 보는 자연주의에도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개인주의

예수님은 야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셨으나 다시 세상에 돌아가기 위한 준비로 그리하셨다.
 
우리는 자연을 구실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분을 피하고 있지 않은지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한다.
 

영적 미혹

심리학자들은 성지를 여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성경 인물이나 심지어 예수님으로 생각할 정도로 감격에 빠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나님의 음성은 자연을 통해 속삭일 때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통찰을 아주 세심히 검증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산책 중에 '받았다'고 해서 무조건 권위를 둘 것이 아니라, 검증 대상의 조언으로만 생각해야 한다. 확실한 기준은 성경뿐이다.
 
사탄은 우리를 곁길로 빠뜨리려 모조품을 만들어낼 것이다. 그런 모조품 체험을 구하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한다.
 

자연의 우상화

어떤 자연주의자들은 범신론, 즉 자연 숭배의 우상에 쉽게 빠질 수 있다. 범신론은 거짓말이다. 모든 자연 속에 하나님이 있다든지, 자연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단, 피조 세계에 둘러싸일 때마다 하나님의 존재를 보는 것은 사실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땅이 주님의 것'이라고 가르친다. 범신론은 그것을 살짝 비틀어 '땅이 곧 주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작품의 감상을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범신론의 거짓말에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물리적으로 자연 속에 있지 않다. 그러나 보는 눈이 있는 자에게는 그분의 자상한 관심, 뛰어난 창의력, 질서, 그리고 그 이상 훨씬 많은 것들이 밝히 보인다.
 
자연주의도 심하면 중독이 될 수 있다. 성령이 없다면 우리도 우상 숭배의 선을 넘어 범신론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를 가르치는 건전한 교리우리를 지도하시는 성령이 있기에 우리는 범신론이라는 이단에 빠지지 않고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자연의 메세지를 음미할 수 있다.
 

당신에게 딱 맞는 내용이면 5, 당신과 전혀 무관한 내용이면 1이 된다.
항목별로 숫자를 써넣어라.

 


 

1. 나는 하나님에 대해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것을 배울 때 그분이 가장 가깝게 느껴진다. 내 생각에는 자극이 필요하다. 내가 무엇을 믿는지 정확히 아는 것이 내게는 굉장히 중요하다.

 

2. 교회가 감정과 신앙 체험에 너무 주력할 때 나는 답답해진다.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고 바른 교리를 정립할 필요성이 그보다 훨씬 중요하다.

 

3. '개념, 진리' 같은 말이 강하게 와 닿는다.

 

4. 방해받지 않고 몇 시간 공부할 때, 하나님 말씀이나 좋은 기독교 서적을 읽고 혹 소그룹을 가르칠(또는 토의에 참여할) 기회가 있을 때, 나는 하나님이 가깝게 느껴진다.

 

5. 교회 교의학에 대한 책을 나는 재미있게 읽을 것이다.

 

6. 나는 음악 테이프보다 책에 들어가는 돈이 더 많다.

 


 

점수가 15 이상이면 이 기질 쪽으로 성향이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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