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에 화려한 하나님
하나님의 천국 영광에 대한 성경 기사들은 아주 수려할 뿐 아니라 최소한 조용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한 예로 에스겔이 기록한 체험을 생각해 보라. 그는 폭풍을 느낀다.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는 것이 보인다. 신기한 형상과 웅장하고 휘황한 사파이어 보좌도 보인다. 그는 크게 울리는 소리와 요란한 물살 같은 날개 소리를 듣는다.
에스겔은 이어 하나님의 명에 따라 꿀 같이 단 두루마리를 먹는다. 다 끝난 후에도 에스겔은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 채, 감각의 맹공이 너무 강했으리라, 충격 속에 앉아 7일을 보낸다.
겔 10장에도 비슷한 출현이 나온다. 에스겔은 불타는 숯불, 영화로운 광채, 요란한 소리, 성전에 가득한 구름, 신기한 광경과 동작, 황옥처럼 빛나는 바퀴, 네 얼굴의 그룹들을 경험한다.
성전에 영광이 돌아오자 성경은 다시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이 그 영광으로 인해 빛났다고 말한다. 어찌나 장대한 광경인지 에스겔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나타나신 요한계시록의 경험도 매우 감각적인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이름을 선포하시자 요한은 그것을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이라 묘사했다. 예수님의 머리와 털은 '희기가 흰 양털 같고 ··· 그의 눈은 불꽃같고', 예수님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예수님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았다. 해를 쳐다보려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햇빛이 너무 밝아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바로 요한이 그랬다.
"내가 ··· 그 발아래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하나님의 이런 영광의 모습은 요즘 흔히 축하 카드에 많이 나오는 얌전하고 조용한 예수님 그림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런 그림은 십자가에서 고난받아 상하고 피 흘리신 예수님과도 전혀 닮은 구석이 없다.
침묵만이 경건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천국이 약간 불편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것이 우리가 감각주의 영성에서 배우는 교훈이다.
우리의 오감은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감각을 통한 즐거움은 사탄의 착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이디어였다.
우리 각자 안에는, 미의 존재 앞에 감탄하는 뭔가가 있다. 그것이 초월적 천국에 대한 우리 갈망의 찰나적 단면이라고 느껴진다. 그런 눈을 가질 때 예배의 감각적 측면에 마음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감각 깨우기
감각 깨우기
청각
예배에 음악을 사용하라는 성경의 권고는 놀랄 일이 못된다.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은 언어와 음악이 합해지면 언어만 있을 때보다 두뇌에 더 자극이 된다는 것을 아신다.
아주 현실적 의미에서, 회중은 설교 때보다 특별 음악 순서 때 더 '살아 있을' 수 있다. 가르침은 잊어버려도 노래 가사는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수 있다.
루터는 성경이 본래 읽기보다는 듣도록 된 책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이 가장 잘 변화되고 도전 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루터의 통찰의 타당성이 과학으로 입증되고 있다. 성경을 그냥 읽기보다는 읽혀지는 소리를 들을 때 우리의 생각은 더 활성화 된다.
후각
냄새는 기억을 굳혀줄 수 있다.
구약 시대에 향이 예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냄새의 바로 그런 특성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익숙한 냄새는 예배자에게, 예배가 유난히 풍성했던 때를 떠올려 줄 수 있다. 예배 후 남아 있는 향기는 신자에게 예배의 경험을 되살려 준다. 그렇게 한동안 지나면 신자는 냄새에 조건화되어 하나님의 임재에 의식적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향품의 헌물을 모아 냄새 좋은 향을 만들라고 명하셨다. 아론은 아침마다 향을 피워야 했다. 엘리와 솔로몬은 향을 사르는 일이 중단되지 않게 했다. 향기로운 향을 만드는 구체적 지침은 출 30장에 나와 있다.
하나님은 말라기에서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라고 예언하신다.
아기 예수에게 드려진 예물 중에도 유향이 있었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향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성도들의 기도와 끊임 없이 올려진다. 시 141:2에는 향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성경에 분향의 부정적 사례도 등장하지만 그것은 우상 숭배와 연관된 경우이거나 타락한 신앙 속에 드려진 경우다. 거부된 것은 향의 오용이지 사용 자체가 아니다.
기도에 몰입하기 힘든 경우 신자들은 개인적으로 낯익은 냄새를 써서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촉각
기도 중에 깨어 있기 힘들거나 마음이 어지럽다는 하소연을 나는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자주 듣는다. 새벽에 특히 그렇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작은 물건을 챙겨 손에 쥐고 한다면 기도가 한결 쉬워질 수 있다.
페이퍼 클립은 위태로운 부부관계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할 때 좋고 고무 밴드는 유연한 마음을 위해 기도할 때 좋다.
시각
시각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도 클 것이다. 우리 대뇌피질의 자그마치 3분의 1이 시각 처리에 할애된다. 그 정도면 인간 두뇌의 최고 수준이다. 연구진들은 시각의 활용으로 의지에 영향을 입힐 수 있다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의지는 믿음대로 살려는 우리의 헌신과 직결된다.
기독교 예배와 기도에 시각이 사용된 것은 성육신에서 기원한다. 물론 시각은 구약시대에도 예배의 필수 요소였다.
이스라엘의 예배 형태를 제정하실 때 하나님은 특별히 브살렐과 오홀리압 두 사람에게 재능을 주시고 지명하셔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셨다. 이 두 장인은 금은과 놋과 나무로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그들은 세마포에 수놓는 기술과 정교하고 수려한 베를 짜는 기술도 익혔다.
완성된 성전의 모습에 예배자들은 숨이 멎을 듯했을 것이다. 하나님께 아름다움은 중요하다. 성전 건축에 든 지출은 향기로운 제물이었고, 재능을 바쳐 성전을 지은 자들은 큰 존경을 얻고 '하나님의 신이 충만한' 자로 통했다.
그림이나 성상의 형태로 시각을 사용해온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성인의 순종을 상징하는 성상의 모습은 정교회 그리스도인이 어려운 성경 말씀에 마침내 '예'로 반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런가하면 성상에 나타난 이미지는 그리스도인을 기도로 이끌어줄 수도 있다. 성상에서 기도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예배 형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성상이 대변하는 실체를 떠올림으로 기도에 더 잘 집중할 수 있다.
아이들은 주의가 쉽게 산만해지기 때문에 기도의 집중을 위해 눈을 감게 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어른들의 경우 남을 위해 기도할 때 상대방 (혹은 사진) 을 보며 기도하면 기도의 능력이 더할 수 있다.
하늘을 보면서 예배하거나, 기도하거나, 시편을 외우면 방해되기는커녕 오히려 말의 진실성이 더해질 수 있다. 시각의 영향은 막대한 것인 만큼 예배에 통합되는 것이 절대 바람직하다.
창의적 그리스도인들은 시각 요소를 기도에 통합할 수 있는 자기만의 길을 찾을 줄 안다.
미각
맛의 비유로 표현되는 말이 많을 정도로 미각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다. 경험이 없어 뭘 모르면 '맛을 봐야 안다'고 하고, 반대로 경험이 알차면 '맛을 톡톡히 봤다'고 한다.
마음에 '쓴' 뿌리가 있는 사람은 심술을 부리며 양심을 품는다. '달콤한' 추억은 아주 아름다운 추억이다. 취직은 되었으나 타지로 떠나야 한다면 그것은 '쓴맛단맛'다 보는 셈이다.
두 연구자는 이렇게 말했다.
"소위 맛이라는 지각은 연상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위력과 강도가 아주 커 다른 모든 영억의 경험에도 맛의 언어가 자연스레 전이되는 듯 보인다."
미각을 사용해 영적 생활에 유익을 얻지 말아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진짜 포도주가 내 성찬의 체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앞서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성찬의 감각적 측면 때문에 자칫 성찬이 요구하는 헌신을 도외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맛은 건강한 영혼의 성찬 체험을 강화시켜 줄 수 있다. 서둘러 치르지 않고 시간적 여유를 갖는다면 특히 그렇다.
맛과 관련된 성경 말씀이 꽤 있다. 마 7:16은 열매로 사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다음에 유난히 맛있는 (혹은 썩은) 사과나 오렌지를 베어 물 때, 이 말씀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자처하셨고 우리를 이 땅의 소금이라 부르셨다.
감각주의의 영성의 유혹을 살펴보자
감각주의의 영성의 유혹
알맹이 없는 예배
감각은 우리를 속일 수 있다. 음악을 통해 감정이 고조될 때 특히 그렇다. 생각은 딴 데 가 있으면서 입으로나 주님 앞에 엎드리겠다고, 땅 끝까지 주의 이름을 전하겠다고,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약속한다.
햄버거를 주문할 때 만큼이나 무감각하게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배 중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미의 우상화
피조 세계의 감상에 애착이 스며들 때 자연주의자들이 우상 숭배에 빠질 수 있는 것처럼 정교한 성전이나 아름답게 그려진 성상의 감상에 애착이 개입되면 감각주의자들도 우상 숭배에 빠질 수 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일개 천사가 사람들 앞에 나타나면 성숙한 선지자들조차 그들을 예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것들은 참되고 순결한 예배를 받으시기 합당한 유일한 분으로부터 우리 마음을 빼앗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참된 임재에 들어서지도 않은 채 극도로 아름다운 예배 의식의 감각적 체험에 만족해 자리를 떠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예배를 예배함
불행히도 우리는 오감을 사용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서 오감을 사용해 예배를 예배하는 자리로 자칫 빗나갈 수 있다.
감각적 자극와 의지의 참된 헌신을 혼동할 때, 감각적 예배는 미숙한 것이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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