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일 양육/영적 기질

박애주의 영성: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가 사랑하시는 자 2024. 5. 15. 10:41

성경에 나오는 박애주의자들

박애주의자들은 자신의 소명과 기질을 이해하려 함에 있어 특히 두 사람을 살펴볼 수 있다. 모르드개와 예수다.
 

모르드개

에스더서에 그려진 모르드개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을 깊이 정성껏 돌보고 아낌 없이 에너지를 쏟아 도와 주는 이의 초상이다.
 
모르드개의 첫 번째 그림은 에 2:7에 나온다. 거기서 우리는 부모의 강제 이주로 인해 고아가 된 에스더를 거두는 모르드개를 볼 수 있다.

"그 부모가 죽은 후에 모르드개가 자기 딸같이 양육하더라."

 
에스더를 위한 모르드개의 수고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녀가 왕궁에 들어간 후에도 그는 늘 에스더가 잘 지내는지 깊은 관심으로 지켜 보았다. "모르드개가 날마다 후궁 뜰 앞으로 왕래하며 에스더의 안부와 어떻게 될 것을 알고자 하더라."
 

예수

유사 이래 진정 온전한 인간은 예수 뿐이었다. 그래서 예수에게는 9가지 영적 기질이 모두 보인다.
 
그 중에서도 예수님은 긍휼의 완전한 표상이었다. 그분의 삶은 특히 그 부분에서 빛을 발한다. 예수님은 병든 자, 귀신들린 자, 잃어버린 영혼을 돌보셨다. 그분은 제자들에게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셨고, 친히 무리를 보시며 몹시 측은히 여기셨다.
 

박애주의 영성의 여러 형태를 살펴보자

 


 

박애주의 영성의 여러 형태

우리는 박애주의 영성의 정의를 환자들에 대한 간호로 제한시킬 필요가 없다. 이웃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은 얼마든지 많으며, 박애주의 영성은 그것을 잘 통합한다.
 
노인의 침상 옆에 말 없이 앉아 있어 주는 것도 긍휼일 수 있다. 자원봉사 구조대에서 일하거나 집을 수리해 주는 것도 긍휼일 수 있다. 생각해 볼 만한 활동들을 몇 가지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죄수와 자매결연을 맺는 것

2. 개인적 위기를 만난 친구를 도와 주는 것

3. 돈을 빌려 주는 것

4. 약물 중독과 싸우는 사람을 거드는 것

5. 구조대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것

6. 문맹에게 글을 깨쳐 주는 것

7. 매 맞는 여성 보호 시설에 시간을 헌신하는 것

8. 미혼모 상담소에서 상담하는 것

9. 노숙자를 위해 주방에서 일하는 것

10. 남의 차를 고쳐 주는 것

11. 집을 수리해 주는 것

12. 시각 장애자를 위해 녹음해 주는 것

13. 질병의 치료약을 연구하는 것

14. 컴퓨터 시스템 재구성을 도와 주는 것

15. 피곤한 부모들의 자녀를 봐 주는 것

 
내 욕구를 채우려는 봉사가 아니라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먼저 가족들부터 즐거이 돌봐야 한다.
 

박애주의자들은 선지자다

남을 돌보는것은 선지자적 행위이다. 우리는 자기 중심적 동물인지라 남에게 관심을 품는다는 것은 비본성적 반응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초자연적 손길에 대한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박애주의자들이야말로 아주 가시적 방법으로, 즉 긍휼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냄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는 증인이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 인간의 본성적 반응은 이기적이다. 성경에 그런 모습이 많이 나온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좌우 양편에 앉고 싶어했고 나머지 제자들은 거기에 분개했다. 야곱은 음모를 꾸며 에서의 장자권을 가로챘고, 롯은 제일 좋은 땅을 선취했다. 여리고로 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다친 사람을 못본 척 했다.
 
'선지자적' 긍휼은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와야 한다. 즉 하나님이 나를 한 없이 사랑하심을 알기에 남들을 돌보는 것이라야 한다.
 

박애주의 영성의 유혹을 살펴보자

 


 

박애주의 영성의 유혹

판단

남을 돌보는 것이 영의 양식이 된다면 마르다의 교훈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칫 묵상주의자들은 '너무 거룩해 실생활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발 앞에 앉아 경배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마르다에게 아주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
 
박애주의 영성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판단해도 좋다는 통행증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을 돌보도록 부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본분을 다하는 길은 각기 다를 수 있다.
 
타인의 예배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다.
 

이기적 동기로 남을 섬김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봉사 욕구를 느낄 수 있다. 영성으로서의 긍휼은 남에게 다가감으로 하나님께 사랑을 표현한다. 마음에 사랑이 넘쳐 주변 사람에게 흘러가는 것이다.
 
반면 질환으로서의 긍휼은 사실상 탈취 행위다. 그것은 기만 행위다. 상대를 사랑하되, 보상으로 자신을 사랑하거나 의존하게 만들려고 그리하기 때문이다.
 

편협한 정의

행동주의 영성과 박애주의 영성에는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을 수 있다. 사실 긍휼 사역을 하다가 행동주의자로 전향하는 사례가 왕왕 있다. 도심지 빈민을 돌보던 사람은 결국 그 일에 방해가 되는 정부 구조의 개혁 작업에 뛰어들 수 있다.
 
박애주의자들은 행동주의자의 동기를 판단하려는 유혹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둘은 함께 일할 수 있다. 한 쪽에서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힘 쓰는 동안 다른 한 쪽에서는 문제가 풀릴 때까지 위안을 베풀 수 있다. 긍휼의 정의가 편협해 결국 문제 해결을 위한 장기적 돌봄과 문제 경감을 위한 단기적 돌봄의 구분을 놓치지 않도록 조심하라. 하나님 나라 사역에는 양쪽 다 필요하다.
 

측근 사람들을 무시함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열정도 좋지만 하나님이 가정에 우선 순위를 두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내 욕구를 채우려는 봉사가 아니라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먼저 가족들부터 즐거이 돌봐야 한다. 아이들 돌보는 것을 자기 예배의 중심부로 여길진대 어린 자녀들을 둔 젊은 주부의 시각은 일대 변혁을 일으킬 것이다.
 
젊은 아버지는 세상을 바꾸는 일이 자기 집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